▣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0- 나는 무엇을 아는가?

영광도서 0 516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던진 질문이다. 그는 자국어로 Que sais-je?라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의 질문, 앎에 대한 질문인 줄은 알겠으나 너무 범위가 넓다. 때문에 무엇에 관한 질문인지에 이르기조차 어렵다. 정체성에 관한 질문인지, 지식의 범위에 관한 질문인지 종잡기 어렵다.

 

앎에 관한 질문이라면? 18세기 그 무렵이면 조금 쉬웠을 수도 있겠다. 그때는 앎이 지금에 비하면 훨씬 적었으니까. 앎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흔한 말로 다변화되는 세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다변화란 말 속에 수많은 지식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다. 앎은 분화이며 분류이며 쪼개짐이다. 하나로 보고 있던 것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셋으로 여섯으로 서른여섯으로 수없이 분화한다는 뜻이니 인간에게 던져진 앎, 아니 인간이 호기심으로 시작한 앎은 현대에 이르러 마치 공중에서 터진 수소폭탄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한없이 앎을 잉태하고 앎을 출산한다.

 

그 시작은 거슬러 오르고 오르면 이브에 이른다. 상징적으로 이브의 과일 하나에 관한 호기심이 세상이 선과 악 둘로 나누어짐을 발견하고, 다시 선은 이러저러한 선으로, 악은 이러저러한 악으로 분화함을 인간은 배워간다. 게다가 선과 악이 다시 합쳐진 혼돈의 상황의 줄기를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앎이 확산하였으니 세상은 이제 다변화, 다양화란 말로 정의를 시도하는 정도밖엔 접근할 수 없다.

 

앎? 앎은 분화이다.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분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충량은 같은데 그 안에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분류, 종류 따위가 늘어나는 것이며, 추상적인 것이 구체화하는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 특성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산하는 정보 또는 앎은 복잡다변화 된다. 그러면서 점차 본질은 그러한 주변적 요소들로 둘러싸이고 또 다른 본질을 낳는다. 소위 원자화한다. 지식의 원자화이다.

 

하지만 각각의 원자화한 것들 속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유사한 특성이 있다. 이렇게 분화는 서로 다르다는 전제로 수를 늘려 새로운 지식을 낳는다. 반면 이렇게 다변화한 지식들의 본질을 찾다 보면 다시 하나로 합쳐짐을 발견한다. 이쯤에서 통섭이란 말이 나오고 통찰이란 말이 나온다. 결국 ‘하늘 아래 새것이 없나니’라는 성경 말씀처럼 새롭다 여길 뿐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본질은 본질 그대로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식의 총량이 확산할 대로 확산하여 세분화란 이쯤에선 다시 본질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제 앎이란, 아니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묻는다. 아니 무엇을 알아야 하나라고 묻는다. 추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러한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다시 잘게 나누어 설명하는 것, 그것을 알려 한다. 그것이 진정한 지식이라 나는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 무엇이 있다면 나는 그것에 관한 확실한 심상 곧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그 심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도 확실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곧 지식이요, 앎이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심상을 전할 수 없다면, 그건 내 지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기준에서 새로운 앎을 분류하고,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때문에 나는 지속적으로 내가 알고자 하는 것들을 세심하게 분류한다. 나눈다. 쪼갠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을 시도한다. 잘 전달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공부한다는 것, 아니 공부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너는 무엇을 아느냐라는 물음에 나는 이것만은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 나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보려고 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볼 수 있는 만큼 알 수 있다. 알고 있는 만큼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어려운 것을 그대로 어렵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을 확실히 이해하여 쉽게 설명하거나 쉽게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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