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1- 나는 나를 아는가?

영광도서 0 552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문장의 구조는 인과구조를 잘 보여준다. 곧 A하면 B하고 B하면 C하다의 구조이다. 무엇을 정의할 때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게 가장 간명하고 간단하지만, 확장 가능성을 말할 때는 위와 같은 구조로 말하면 좋다. 세 가지의 명제, 가언삼단논법에 해당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가언삼단논법을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이 구조에 맞추어 ‘나는 나를 아는가?’에 질문의 전제를 만들려 한다.

 

‘호기심이 잉태한 즉 질문을 낳고 질문이 장성한 즉 지식을 낳느니라.’ 이 문장을 전제로 앎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지식은 누가 얻은 것이든 그 시작엔 호기심이 있었고, 질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궁 즉 통이란 말 역시 호기심을 말한다. 무엇에의 관심은 궁금증을 유발하고, 궁금증을 갖는 순간 그것을 알려 노력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것을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묻는가 하면,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그것을 알아내고야 만다. 물론 개인차가 있어서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기어이 알아내고야 마는 사람도 있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사람도 있긴 하다. 궁금증을 풀려는 욕심을 가진 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는 만큼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질문할 수 있고, 질문을 하는 만큼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선 호기심을 가지라, 그리고 질문하라, 그러면 새로운 앎을 얻는다.

 

욕망은 어감이 그럴 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욕망이야 말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무엇이든 알려는 욕망, 그 욕망이 앎으로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간단한 나 자신에 대한 질문, 나는 나를 아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또한 중요한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앎의 근원은 나를 아는 것에 있다.

 

나를 아는 것, 이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과연 무엇인가, 아니면 누구인가, 이러한 추상적인 질문에서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향할 때 나 자신을 조금씩 알아간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모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 실제로 나는 나 자신에 관해 규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나 자체이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에 관해, 인생에 관해 생각하거나 고찰한다. 내가 나를 모르면서 나를 가장 크게 확대한 인간을 묻는다. 인간을 알려면 나를 먼저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묻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알아가려면 우선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다. 나의 정체성은 명확한 듯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 단순한 듯 느낌은 내가 규정하는 정체성을 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일뿐이다. 심리학으로 에고라는 ‘자아’이다. 남들은 모르는 나, 내가 아는 건, 남들에게 보여주는 나와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나, 이 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만 아는 나는 나만 알고 있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을 나는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모두를 나는 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규정한 나, 곧 나의 자아라고 믿는다.

 

나는 진정한 나라고 믿는 것을 남에게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나를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그는 나의 말을 듣는다. 나의 행동을 본다. 그리고 그는 나를 파악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나를 규정한다. 그것이 남이 보는 나로, 타인이 규정한 나다. 그 나는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을 보는 눈은 각자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를 규정한 타인의 시선은 나와 관계를 맺는 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의 자아, 남들이 규정한 자아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처럼 나는 나를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아는 나를 알 정도이고, 누군가 나를 정의한 정의 정도로 나를 알 뿐이다.

 

그렇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나로 규정할 뿐이다. 그리고 너는 나를 안다. 내가 보여주는 언행, 그것인 나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네가 보는 나는 내가 아는 나와는 다르다. 그것도 또한 나다. 때문에 나를 제대로 알려면 내가 아는 나, 곧 내가 나라고 믿는 나와 네가 아는 나, 네가 기억하는 나, 곧 나에 관한 나의 이미지를 합한 나를 나로 인정한다면 나는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알 수 있다. 네가, 수많은 네가 기억하는 이미지는 모두 나이며,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내가 내가 아는 나이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너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나를 알려고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나는 나에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질문한다. 나는 그 질문으로 내 안에 나를 발견한다. 네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를 묻는다. 네 대답을 듣는다. 그것이 내가 지금 아는 나이다.’ 나는 질문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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