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4- 수필은 중년의 글

영광도서 0 557

피천득 선생은 <수필>에서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라고 썼다.

 

이 글을 수필의 정의로 받아들인다면 우선 청춘이 뜻하는 바와 중년이 뜻하는 바를 알아야 피천득 선생이 말하려는 수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뜻을 선생에게 물을 수 없으니, 각자 나름 그 의미를 찾아서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청춘이란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춘을 정의할 수는 있다. 거창하게 정의를 내릴 것이 아니라 돌아보아 그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돌아보면서 나름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면 그것이 곧 ‘청춘은 이런 것이다’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청춘을 세분하면, 20대란 앞만 보면서 달린, 타자를 돌아볼 여유 없이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달린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시절이다. 30대에 접어들면 <서른 즈음에>란 노랫말처럼 잊혀져 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기도 하는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던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반차하기도 하는 시절이다. 후회도 하고 원망도 하고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뒤에 남는 것들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되돌아 다시 살아보고 싶기도 한 시절이다. 이때까지를 청춘이라고 하자.

 

이에 반해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은 중년을 40대로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즈음을 중년으로 본다면, 중년은 다시 앞을 보는 시절이다.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도 보고 뒤도 옆도 보는, 고루 돌아보는 시절을 이른다. 공간적으로는 앞사람, 뒷사람, 옆사람을 고루 돌아보는, 이를테면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직장 동료며 친구들을 두루두루 돌아보면 자신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산다. 시간적으로는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동년배들을 보면서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기, 이 시기를 중년이라 부른다.

 

이처럼 중년을 알려면 중년 자체로는 정의 내리기 어렵다. 청년과 노년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알아야 중년을 따로 떼어놓고 정의할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청년은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노년은 짐작할 따름이므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중년을 나름 정의한다면, 중년은 노년을 향하여는 청년으로 여기며 청년 행세를 하고자 하는 시기요, 청년을 향하여는 어른 행세를 하려는 시기로 자칫 꼰대소리를 듣기 좋은 시기가 중년이기도 하다. 노년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중년, 이렇게 보면 중년은 양쪽 어디에도 정확하게 속하지 않은 세대로서 사춘기와는 좀 다른 농익은 일탈을 꿈꾸는 시기이자, 전후좌우를 살피는 배려와 인식이 가능한 지적 충만을 꿈꾸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철학적으로 보면 자칫 실수하기 쉬운 피 끓는 청년도 아니고, 너무 고요한 노년도 아닌 중간쯤이니 적당함, 중용을 말할 수 있는 시기 아닌가 한다.

 

피천득 선생이 말한 중년은 이 지점쯤인가 한다. 지나치게 열정적이지도 않고 노회하지도 않은, 명상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사색쯤의 글, 지나친 자기주장도 아니고 무기력한 자포자기와 같은 자기고백도 아닌 배려의 글, 후회도 아니고 좌절도 아닌 자기반성의 글, 자신도 돌아보고 남도 배려하거나 고려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잡은 글, 남을 바라보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얻은 중용의 글, 그래서 누가 읽어도 삶의 무늬가 배여 있고 인생의 따뜻한 고백이 담겨 있는 글이 수필이 아닐까 한다.

 

중년의 글 수필은 ‘너 이렇게 살아’라고 조언하거나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주장하는 글이 아닌 ‘난 이렇게 살았어. 그랬더니 이렇더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이렇게 살기로 했어.’라는 고백이자 각오를 나의 문제로만 이야기한 글을 말한다. 이처럼 수필은 주장도 아닌 조언도 아닌 글이다. 나의 경험도 좋고 내가 들은 이야기도 좋고, 내가 목격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좋다. 나의 생각도 좋고 다른 이들의 생각도 좋다. 그런 모두를 내 안으로 받아들여 나의 생각, 내가 생각하는 삶을 묻혀 내보내는 게 수필이다. 그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언어, 일상적으로 쉽게 사용하는 언어로 편안하게 자기사색으로 쓰면 충분한 글이 수필이다. 남의 이야기이든 나의 이야기이든, 그 이야기를 가지고 ‘나는 인생을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어. 그랬더니 이런 것은 좀 좋은 것 같더군. 이런 것은 좋더군,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겠어.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겠어.’로 누구의 이야기이든 상관없이 순전히 나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내보내는 글이어서 읽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가르치지 않으면서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 마음의 움직임을 이끄는 글이 수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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