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6- 우리 때는 이랬는데

영광도서 0 498

잘은 모르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가끔 들은 말,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자 내 또래들이 주로 하는 말은 ‘우리 때는’이다. 어쩌면 80대는 70대에게, 70대는 60대에게, 60대는 50대에게, 대략 10년 단위, 아니면 한 세대라고 보는 30년 단위로 인생의 후배들을 향해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 때는 이러 이러했는데’일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 흐르면 산천초목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조금씩은 변하듯이, 사람의 삶의 모습들도 점차 뱐하기 마련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마음도 변한다. 마음이 변하니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나와 한 세대쯤 뒤를 따라오는 인생의 후배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도 아주 다르다.

 

지난주에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전철을 타고 오다 엿들은 이야기다. 남녀 학생 한 쌍이, 한 쌍이라지만 연인관계는 아닌 것 같고, 같은 과 학생인 듯싶다.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학교 학생이 맞다. 시험성적 이야기를 하면서 여학생이 “야! 너 시험 잘 봤니?” 라고 남학생에게 묻는다. 남학생, “아니, 난 충분히 이해하고 잘 쓴 것 같은데 성적이 C야. 이해가 안 된다야.” 여학생, “어, 그래? 나는 잘 이해를 못하고 그냥 봤는데 잘 나왔는데.”란다. 남학생이 학점이 어느 정도 나왔느냐고 묻자 “내가 예상한 것보다 잘 나왔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아주 잘 나왔다는 건 아니고.”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인 즉 “00교수, 사람 좋은 척만 하지 위선자야.”하면서 마치 교수를 입에 올리면서 친구 이야기하듯 한다. 젊은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니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그 말이 떠오른다.

 

그래, 나 때는 그랬다. 교수라면 우러러 보였다. 어른 대하듯 깍듯이 대했다. 서로 대면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입에 올릴 때도 뒤에 ‘님’자를 뺀 적이 없었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속으로도 그렇게 보았다. 대단한 존재로 보았고, 그랬으니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교수들이 모두 훌륭한 인품을 가졌고, 언행이 바랐을까?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강의 시간에 담배를 꼬나물고 피워대는 교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런 거려니 했다. 지금 같으면 당장 교직을 내려놓고 쫓겨났을 행동을 한 교수들이 지금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우리는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다.

 

지금 세대에 비하면 우리는 부끄럽다. 무지한 것이 부끄럽다. 때문에 ‘우리 때는 이랬는데’가 긍정적인 말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솔직하게 말하는 요즘 세대들의 모습, 알고 접근하면 오히려 편하다. 그만큼 시대가 흘렀다는 뜻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마음도 변했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나는 늘 꼰대로 존재한다. 물론 젊은 세대가 장점만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 때는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에 왔으니 강의 시간에 듣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들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적어도 우리 때보다는 많은 듯하다. 또한 교수나 선생을 바라볼 때 존경은 아니더라도 어른으로 보는 예의도 그때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존경하는 어른이 없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어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어른이 없음은 그들에겐 불행하다. 하긴 우리 ‘꼰대’들이 더 문제다. 어른이란 본이 되어서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내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랴. 꼰대가 아니라 닮고 싶은 인물, 앞서 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인물, 그런 인물이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함이 그들에게 미안하다. 우리 때는 ‘닮고 싶은 이들’이 꽤 있어서 그나마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터이다. 존경 받을만한 이들이 많은 사회는 꽤 살만한 세상이지만, 존경할 만한 이들이 없는 사회는 삭막한 사회다. 가끔 사회가 어지러울 때면 한 말씀 하시면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 그런 인물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우니 안타깝다.

 

젊은 세대가 볼 때 꼰대는 별로 없고 어른다운 어른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할 텐데. 요즘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보면 솔직히 꼰대는 많으나 인물은 별로 볼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꼰대들은 늘 뉴스에 오르내리니,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 역시 우리를 어른다운 어른이 아닌 ‘꼰대’로 볼 듯싶어 쓸쓸하다. 나라도가 아니라 나부터 꼰대 짓 하지 말고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인생의 선배다운 선배가 되어야할 텐데. ‘내 안에 웅크린 꼰대야 이제 가거라. 다는 못해도 니 나잇값은 하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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