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20- 상징은 지혜를 낳는다!

영광도서 0 564

지식은 직접경험이나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 이를테면 사용가능한 정보를 말한다. 경험하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용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막연하게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진정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사용가능한 정보만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남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남에게 온전히 설명 가능하다,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 이처럼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제대로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식이라고 전제한다.

 

때문에 전달 가능한 정보를 평소에 갖기 위해선 무엇을 보든 차근차근 봐야 하고, 뜯어 봐야 하고, 자세히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것 같으나 막상 안다고 믿는 정보를 남에게 전달하려니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는 척보다는 알려는 마음가짐, 과시욕보다는 제대로의 정보를 얻으려는 마음가짐이 보다 중요하다. 이를 그리스신화에서는 ‘제우스가 사려분별의 여신 메티스를 통째로 삼켰다’고 표현한다. 원리와 작용, 개념과 설명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떤 정보를 얻든 그 정보를 활용 가능할 만큼 자세하고 확실히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식은 문학용어에서 비유에 해당한다. 무엇을 설명할 때 상대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선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을 비유적 설명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와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그는 내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지식은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 정보만을 말한다. 자랑하려기보다 설명하기 위해, 전달하기 위해 유용한 정보가 지식이다. 아는 척보다는 제대로 알자.

 

이에 비하면 지혜는 상징이라 할 만하다. 상징은 있는 그대로의 피상적인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것과는 다른 이면의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지식정보는 하나의 설명으로 끝나는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라면, 상징정보는 하나의 설명 그 이상의 여러 설명이 가능한, 여러 설명을 유도하는 추상적인 정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을 해석하는 것이 지혜의 영역이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상징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나름의 답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한 문장에 불과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무렵에 활동한다.”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올빼미를 올빼미로 보지 않고, 미네르바에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지혜로 본다는 것이 우선 해석의 영역으로 지혜의 발단이요, 황혼이 단순히 저녁하늘의 기본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하루의 저녁 무렵이나, 인생의 저녁 무렵으로 보는, 곧 피상적인 모양 이면에 내적인 면, 인생으로 보는 등의 여러 의미적인 면으로 보고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해석이다. 때문에 지혜는 상징의 영역이자 해석의 영역이다. 상징은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꽃이 피었다’를 그대로의 모습으로 읽는다면 이는 지식의 차원이라면, 꽃이 핀 것처럼 인생에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다로 나아간다면 비유로의 발전이요, 이러한 설명을 생략하더라도 인생과 꽃을 연결한다면 상징의 문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그러니 무엇을 보든 상징으로 보고 그것에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지혜의 문으로 들어선 셈이다. 해석은 지혜의 영역이다. 무엇을 보든 해석하려는 시도, 이러한 시도를 거듭하면서 무엇을 보든 남에게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의미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혜롭다 할 것이다.

 

예컨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무렵에 날갯짓을 시작한다.’는 문장을 단순하게 생물학적인 차원, 경험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생의 영역, 우리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곧 이 문장 전체를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문장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면 그것은 지식이요, 그것을 해석하면 이 또한 지혜의 영역이다. 세상을 어둠의 상징으로 보고 어둠에서 말을 찾고 의미를 찾는 것이 또한 지혜이다. 지식이 1:1의 영역이라면 지혜는 이처럼 1: 다의 영역이다. 적용의 확장성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행동, 글 따위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판단함’이란 해석의 사전적 의미처럼 무엇을 보든 상징으로 보고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무엇을 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무엇을 보든 상징으로 보고 나름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자. 그러면 남보다 그 하나를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그 하나에세 남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지혜는 잘게 나누고, 나누어진 면들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보다 생산적이며, 보다 확산적이며, 보다 창의적이다.

 

온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토양에서 지혜의 나무는 자란다. 온전한 지식 하나는 그 하나를 바탕으로 여러 정보를 발산한다. 그러니 무엇을 보든, 무엇을 얻는 제대로 알고 얻어서, 온전한 정보로 기억한 다음, 그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보든 자세히 보고, 나눈 정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자. 이제까지 의미 없었던 것에 의미부여의 시도가 곧 해석이요, 그것이 곧 지혜의 영역이다. 나누어보기의 시도, 해석의 시도, 나는 지금 지혜의 문고리를 잡고 지혜의 문을 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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