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36- 왜 깨달음인가?

영광도서 0 390

지식, 앎은 무엇을 나름대로 모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묘사 능력, 곧 무엇을 알아듣거나 이해하도록 나름 설명하는 능력이다. 때문에 확실한 지식은 이리저리 활용할 수 있다. 소위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말이 지식의 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지식이 활용이라면 지혜는 지식을 종자삼은 응용능력이라 할 수 있다. 아는 범주에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본질이 유사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때문에 지혜에 들면 아는 만큼 알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알려고 하는 만큼 더 알 수 있다, 보려고 하는 만큼 더 볼 수 있다, 들으려 하는 만큼 더 들을 수 있다, 라 할 만큼 지금의 차원을 넘어서 이리저리 더 활용하는 것으로 응용의 차원이 지혜이다.

 

전달 가능한 설명과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의 차원을 넘어선 지혜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려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물론 지식이 지혜의 씨앗인 한에서 할 수만 있다면, 마음만 먹는다면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차원만 고집하면 그는 지식은 많으나 지혜를 얻지 못한다. 그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거나 자기 편견에 빠져 있어서 더는 다른 세계를 알려고도 않고 보려고도 않고 그 세계에 만족한다. 그 세계만 믿을 뿐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쓴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문구를 지혜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세계에서 머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뚫고 나오려는 존재만이, 지금의 나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나만이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곧 지금의 나는 옳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의 나는 편협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교정한 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규정한 나에게 갇혀 잇을 수 있다는 인식을 하거나 그럴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는 나가 뚫고 나가려는 움직임이다. 때문에 알은 쉽게 말해 지금의 나를 이른다. 지금의 나를 제대로 인식하고 지금의 나는 작고 편협하다는 겸손이 곧 지혜를 향한 용틀임이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안다면 그대로 머물지 않고 지금의 나를 깨뜨리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데, 이는 곧 활용의 시작이다. 이리저리 활용하면서 지금의 나의 능력을 시험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이 지혜이니, 지식을 활용하지 않고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무엇을 안다면, 머리로만 안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한다. 아는 것을 기본으로 실제 삶에 활용할 때 더 이상의 무엇을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이 지혜이다. 그러면 이제 지금의 나를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난다. 내가 옳다는 믿음을 넘어 남이 옳음을 발견하고 남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니고 남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의 발견으로 옳음의 세계는 깨지고 다름의 세계로 나아가면서 보다 폭넒는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를 인정하는 차원이 지혜이다.

 

옳음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세계, 이분법적인 편 가름의 세계는 이제 하나로 볼 수 있는 세계로 나는 나를 인도한다. 이 차원이 지혜요, 중용을 실천하는 세계로 아프락사스의 세계이다. 지혜는 그러므로 옳음의 세계에서 옮긴 다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옳고 그름만 논하면 확장되지 않으나 다름을 인정하면 얼마든 어디에든 응용 가능하다.

 

내가 아는 것을 어느 상황 또는 어디에 알맞게 이용하거나 맞추어 쓰는 응용 능력이 지혜로, 다르긴 하지만 유사한 본질을 이용하여 다른 분야에 응용하는 능력이 지혜로, 사전적으로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을 이른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듯, 지혜의 순우리말은 깨달음이다. 지금의 나를 깨고, 깸으로써 그 무엇에 도달하려는 움직임, 하여 깨고 달하여 얻은 새로운 발견이 지혜이다. 시도하는 자만이, 무엇을 실천하는 자만이 지혜를 얻는다. 아는 만큼에서 알려고 하는 만큼으로, 보려고 하는 만큼으로 자신을 변화하려 시도하는 자가 지혜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알아라, 알면 해봐라, 해보면서 넘어져라, 그래야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 너는 지혜 하나를 얻는다. 알면 건너뛰어라. 빠질 수도 있고 건널 수도 있다. 그러면 너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빠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빠진 곳에서 살아나오는 법을 배운다. 건널 수 있음을 확인한다. 건너의 세상을 발견한다. 이처럼 진일보한다. 이것이 곧 지혜이다.

 

두려워하면 갇힌다. 남에게만 의존하면 갇힌다. 남만 믿으면 갇힌다. 그러니 지혜는 실천의 용기. 지금의 나를 또는 남을 그리고 앎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나친 의심도 아니고, 지나친 객기도 아니고, 지나친 의존도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무엇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질 때 새로운 앎을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이 지혜다. 지금의 너를 깨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곳에 달하라. 곧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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