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43- 정의의 여신 테미스가 필요한 이유

영광도서 0 484

보통 그리스신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으로 본다. 전자는 혼돈이요, 후자는 질서인데, 우주는 혼돈한 상태로 시작되어 점차 질서를 잡은 것으로 신화는 기록한다고 해석한다. 이 질서, 곧 우주의 질서를 그리스신화는 정의로 말한다. 이를테면 정의의 여신인 테미스로, 테미스가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결합하여 낳은 신들이 계절의 신들이요, 운명의 신들이며, 질서, 정의와 평화의 신들이다. 이러한 유형의 신들의 공통점은 모두 순서로, 계절과 운명은 모두 생장소멸이란 순서를 갖춘다. 봄은 싹을 내고, 여름은 성장 시키고 가을은 수확하게 하고 겨울은 소멸을 가져오는 것처럼, 한 생명의 이행 역시, 탄생하면 자라고, 자라면 늙고, 늙으면 죽는다. 때문에 정의의 여신이 낳은 이러한 질서가 곧 정의이다.

 

이러한 질서 자체를 크게는 우주의 질서로 코스모스라 한다면, 좁게는 지구 내에서의 질서로 자연의 질서로 그리스어로는 퓌지스Physis, 영어로는 physics라 한다. 때문에 자연에 관한 학문을 보통 퓌지스라 한다. 따라서 질서의 근본은 우주와 자연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질서에 반하는 것을 자연에 비하요, 자연을 넘는 초자연, 자연을 변형한 예술, 자연에 반하는 인공, 자연을 깨뜨리는 문명으로 나눌 수 있다. 결국 자연에 반하는 존재가 있다면, 지상에서 유일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파괴자로 질서를 깨뜨리는 자요, 정의를 무시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전술에서 카오스가 먼저요 코스모스가 나중으로 신화는 이야기하지만 신화를 말한 자들은 인간은 질서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혼돈을 일으키는 유일한 존재이다. 만일 우주에, 아니 지상에 인간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자연은 그대로 질서를 찾아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질서를 바꾸고 있으니 세상은 여전히 혼돈 속에 거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인간은 근원적으로 질서인 코스모스를, 퓌지스를 말할 자격이 없다.

 

세계의 신화는 어느 신화를 막론하고 태초를 혼돈한 상태에서 시작하긴 하지만, 이는 인간의 자기합리화에 다름 아니다. 차라리 “태초엔 코스모스였다. 그런데 인간이 세상에 등장하였다. 인간은 코스모스를 깨뜨리기 시작하여, 변형을 일으켰으니, 인간의 탄생과 함께 세상은 혼돈 상태로 바뀌었다.” 가 솔직한 인간의 고백일 터이다. 자연이 표현할 수 있다면 필시 나처럼 인간을 카오스의 주범으로, 자연 자신을 코스모스로 말할 것이다.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 질서니 정의니 하는 것은 자연 전체를 이름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하나의 세계로 보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모습이 신화이며, 코스모스의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 망가뜨린 질서를 자체 내에서 다시 질서를 잡으려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의라 할 수 있으니, 자연의 축소판 인간의 질서요, 인간의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 신화이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정의는 곧 질서로, 우주의 질서의 모방이자, 자연의 질서의 모방이다. 우주를 보여주는 하늘을 보라. 하늘엔 항상 별자리들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즉 공간의 코스모스다. 지구가 공전하면서 자전한다는 과학적 증명은 논외로 하고, 본 대로 말하면 태양과 달은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공간의 질서와 시간의 질서를 보여준다. 이것이 정의의 기본임을 그리스신화는 테미스 여신의 분화인 계절의 질서로, 변함없는 운명의 생장소멸의 질서, 삶과 죽음의 질서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정의는 있어야 할 제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장소멸이 정의이다.

 

우선 시간 또는 자연의 질서를 상징하는 계절의 흐름, 생물의 생장소멸은 순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흐른다. 코스모스의 제왕 제우스와 결합한 정의의 여신 테미스는 발아의 신 타로, 다음에는 성장의 신 아욱스, 다음에는 수확의 신 카르포를 낳는다. 그렇게 어김없이 순환한다. 그에 따라 생물들 역시 그 순환을 따른다. 시간은 늘 공간 속으로 흐르며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그러한 공간 속에 위치한 존재들의 생장소멸의 길이를 일률적으로 정하지 않고 운영의 묘를 살려서 시간의 길이를 재고 결정하는 역할이 중요하니, 이를 모이라이 즉 운명의 신들이 담당한다.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담당하는 계절의 신들보다 운명을 결정하는 모이라이의 운영의 묘가 정의를 가름한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러한 순환논리에 순리적으로 따르는 단순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인간만은 인위적으로 조작을 시도한다. 때문에 인간세상에선 파괴와 무질서가 판을 친다. 때문에 다른 존재들에겐 필요 없는 신들이 인간에겐 필요하다.

 

나름 인간은 인간 속에서 코스모스의 실현을 위하여 사회적 질서를 잡으려 한다. 그리스신화의 테미스는 제우스와 결합하여 질서의 신 에우노미아를 낳는다. 에우노미아는 인간 속에 들어와 그릇된 순서를 바로잡는 신이다. 그럼에도 욕망 과다한 인간들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럽다. 때문에 이번엔 정의의 신 디케를 낳는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대신 너무 혼란스러우면 개입하여 다시 바로 잡는다. 디케의 역할이다. 인간은 이때를 변혁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라고 말한다. 그것을 인간은 정의로 믿는다. 그 상태를 유지하려 평화의 신 에이레네를 낳는다.

 

영악한 인간은 첫 마음과 달리 욕심을 내면서 변혁이 일어난 순간에 정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한다. 그러면 평화는 다시 깨지고 질서를 다시 잡아야 한다. 이처럼 정의는 공간에 따르며 시대에 따른다. 절대적 정의라기보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게 마련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때문에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무리가 절대 정의라 생각하는 것 자체는 오만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사회를 보면 정의란 단어를 좋아하나 정의롭지 못하고, 용서란 단어를 좋아하나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이란 단어를 좋아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화합이란 단어를 좋아하나 화합하지 못한다. 누가? 인간이 그렇다. 정의는 곧 질서로 있어야 할 때 있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시간의 순서이자 공간의 순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에 속한 존재들의 질서이다. 정의는 곧 공간 속의 질서이다. 자금 차지한 자리가 제자리가 맞는지, 살펴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정의요, 지금의 흐름이 제대로 순환하는 것인지를 돌아보아 역행하고 있다면 순서를 바로잡는 것이 정의다. 때로는 혁명이라고 한 것이 나중엔 정의가 아니라 불의인 이유, 지금은 혁신인데 나중엔 퇴행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혁명을 하면 그것은 곧 퇴행이요, 어리석은 인간이 혁신을 하면 그것은 곧 파멸이다. 필부의 잘못된 혁신이나 정의감은 자기파멸로 끝나지만, 한 사회를 이끄는 리더의 잘못된 혁신이나 정의감은 사회전체를 퇴보나 혼돈으로 이끌 수 있다.

 

때문에 자연의 파괴자인 인간은 누구나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겸손, 오만에 빠질까 경계하는 성찰, 이 둘을 갖추어야 한다. 제우스는 호라이와 모이라이의 조언을 경청하고 따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라도, 내 욕망과 반하더라도 듣고 받아들인다. 제우스의 두 번째 아내 테미스는 늘 조언하는 신이다. 같은 말이라도 잔소리로 받아들이느냐 조언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리더의 자질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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