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네 살 때 내 생일날의 기억 새창으로 읽기

영광도서 0 464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대부분 여섯 살 이전의 잊힌 기억 중 억압당한 기억을 무의식으로 인정한다. 기옥에 남아 있지 않아서 전혀 모르는 사건들이지만 억압당하여 심리의 밑바닥에 갈앉은 기억, 침전된 기억들이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우리 언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나의 무의식엔 아픈 기억들이 숨어 있을까?

 

적어도 네 살 내 생일 이전의 일들, 내가 태어나서 만 3년 동안 일어난 일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첫 번째 기억 사이에 있었을 기억들, 이를테면 분명히 엄마의 젖을 먹었던 일이며 배설했던 일이 최소한 몇 가지는 기억날 범한데, 전혀 기억에 없다. 또한 첫 번째 기억이 시작된 이후 두 번째 기억 사이의 일들 또한 전혀 모르겠다.

 

다만 생일날 기억이 난다. 이를테면 거창한 내 삶 중 두 번째 기억이다. 엄마 등에 업혀서 빵을 먹었다. 빵을 먹는 나를 업은 엄마의 머리엔 짐 보따리가 얹혀 있었다. 아버지는 앞에서 큰 가마솥을 짊어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논두렁길을 걸었다. 삭막한 들판 중간쯤 어떤 아저씨가 마중을 나왔다. 아버지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 아저씨가 대신 아버지의 짐을 짊어졌다. 논두렁이 끝나는 지점에 좌측으로 잣나무 몇 그루가 좁은 오솔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지점을 지나면서 약간의 오르막길이 밭 사이로 나 있었다.

 

아련한 동화 같은 이 장면, 꿈이 아니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께서 “넌 어떻게 그걸 기억하니? 그게 흑둔지에서 광암리로 이사 오던 날인데. 그 날이 니 네 살 때 생일날이었어. 생일이라고 빵을 쪘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다.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논바닥, 논두렁길, 잣나무, 비탈 밭,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그대로였으니까. 아버지가 짊어진 가마솥은 소여물용 솥이었다. 마중 나온 아저씨는 좀 떨어져 있긴 했지만 앞집인 셈인 그 집의 아저씨, 일명 관수아버지였다. 이후 그 집과는 상당히 오래도록 이웃하여 살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내 삶의 두 번째 기억이다. 엄마, 아버지 그리고 이웃집 아저씨, 이 기억엔 세 사람밖엔 없다. 지금은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신 분들이다. 그럼에도 기억에 생생하니 여전히 내 마음엔 살고 계시다.

 

이 두 번째 기억과 첫 번째 기억 사이엔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지워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많은 기억들이 죽었다는 걸, 사라졌다는 걸 짐작하고도 남는다. 쓸데없는 심리학자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 잊힌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을 테지만. 정신적인 나의 살이 되고 뼈가 되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들, 그 일들이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다만 지금도 기억하는 일들이 내겐 애잔하다. 아리게 힘들었을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애틋한 동화 한 토막 같다.

 

기억을 떠올릴라치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 그 사람들이 애잔하게 그립다. 아니 그 아이가 그립다. 지금은 내가 아닌 듯한 그 아이, 엄마의 등에 업혀 철딱서니 없이, 아무런 세상 걱정 없이 엄마의 등을 즐겼을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 그립다. 엄마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 아이의 등을 두른 띠게는 어떤 색깔이었을까? 기억은 생생한데 흑백의 영상처럼 남은 그 날의 기억들, 그래서 더 정겨운 그날이 잠깐 동안의 동영상처럼 마음속을 배회한다.

 

지금은 그때의 그 분들보다 훨씬 나이 든 내가 이렇게 그리움에 잠겨 글을 쓴다. 당장 그때 젊은 모습의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이웃집 아저씨가 저기서 걸어 나오실 듯하다.

 

코로나19가 두려움을 몰고 오는 지금,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의 처분 따라 살아가는 아이 적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른으로 살기가 이렇게 복잡하다.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아직도 보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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