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 그 시절 풍경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테지.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은 모두 흑백사진 같다. 어디에 누가 있었다, 누구와 함께였다, 누구와 무엇을 했다, 이런 정도만 기억나지 사람들의 생김새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에 선하게 제대로 그림처럼 떠오르는 건 풍경들이다. 다만 동네 풍경이라든가 우리 집 모양이라든가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던 모습들은 그런 대로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칼라 사진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은 초가집이었다. 벼농사를 지을 논이 없어서 밭농사만 지었기 때문에 볏짚이라고는 없었다. 때문에 지붕은 언제나 억새 이엉을 덮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정겨웠던지 초가집을 제법 잘 그리곤 했다. 봄에 심은 호박이나 박 넝쿨이 여름이면 녹색 지붕을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가지붕까지 기어 올라간 박 넝쿨에서 여기 저기 하얀 꽃이 핀 풍경, 거기에 여기 저기 열린 하얀 박들, 달밤이면 달빛을 받은 하얀 박꽃들과 하얀 박이 유난히 희게 빛나던 고즈넉한 풍경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눈에 선하다.
넓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돌부리가 툭툭 튀어나온 앞마당에 나서면 소위 똥개가 꼬리를 치면서 따라다녔다. 꼬리치면서 그렇게 사람을 반기던 똥개들, 종일 할 일이 없어선지 녀석들은 어쩌다 사람이 지나가면 신나서 악을 쓰고 짖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밥값이라도 한다고 녀석들은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옥수수나 콩을 심어 놓은 마당 곁 밭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굼벵이나 지렁이를 찾아서 쪼아 먹곤 하는 닭들도 어쩌다 마당으로 튀어나와 개들과 신경전을 벌이다 도망치곤 했다. 긴 꼬리털과 빨간 부리의 수탉은 멋진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 개들과 자존심을 건 싸움을 벌이곤 했다.
마당 한켠엔 송판으로 이어 짠 아담한 토끼장이 있었다. 잿빛 토끼는 어쩌다 한 마리 있었고 하얀 토끼 두서너 마리가 살았다. 유난히 하얀 털에 유난히 빨간 눈의 토끼들, 칡잎을 뜯어다 철망 사이로 밀어주면 아주 귀엽게 먹어대곤 했다.
겉보기엔 마냥 평화로운 초가집 안에선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형제들이 오골조골 모여 별로 할 놀이가 없으니 형제들끼리 딱치를 치다가 싸움을 벌이거나 울거나 그런 게 다였다. 고요하고 조용한 풍경이었지만 가끔은 아이들 나름의 죽기 살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아이들은 살아 있었다. 시끄러운 욕설과 울음소리로 초가집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대변했다. 닭들도 가끔 삶의 노래를 불렀고, 개들도 가끔 밥값 한다고 짖어댔다.
그렇게 밤이 오면 달밤에 빛나는 하얀 박들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엄마랑 아버지랑 집에 계시니까 감히 아이들은 매를 벌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밤이면 자그마한 바람에도 요란스럽게 춤을 추다 꺼져버리고 하는 노란 금빛 등잔불이 애처롭게 가난한 삶의 애환을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석유를 가장 적게 먹는 등잔불, 그 아래서 어른이나 아이나 못할 일이 없었다. 엄마는 이를 잡거나 바느질을 했고, 아버지는 맷돌에 옥수수를 갈았다. 아이들은 벽지로 사용한 신문지나 책장들에 박혀 있는 글자들 중 알고 있는 글자들만 골라 읽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어쩌다 초가집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만 초가집을 찾기 힘들다. 생각하면 정겹다. 옛 풍경들이. 그립기도 하다. 내가 포함된 그때 그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나이 들어 중년을 넘어 노년을 사는 그때의 아이들 어느 구석에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어쩌다 모인들 그때의 풍경마저 잊은 건지, 그때 그 시절 이야기도 손바닥에 갇힌 모래알들처럼 모두 기억에서 빠져나간 것인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는 그리움은 엄마와 아버지겠지. 그런 것 같다. 복원되기 완전히 불가능한 것엔 언제나 애련한 그리움은 기억 속에 무늬지어 살아 있는 듯싶다.
그건 그렇고 지금 생각하면 울 아버지께서 초가집을 위해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억새는 자칫하면 손을 베이기 일쑤다. 뻣뻣한 마른 억새를 엮어 지붕을 다 덮으려면 이엉 스무 개는 되어야 했을 텐데 얼마나 손을 베었을까. 물론 요령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가난도 풍경이다. 참 정겨운 풍경화처럼. 지금의 사람들 말고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 해진 옷을 꿰매던 엄마, 지붕에 이엉 올리던 아버지, 어린 동생을 띠를 둘러업은 누나, 나랑 가끔 싸우던 작은형,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작은 연극으로라도 만나고 싶다. 시절이 그리운 건지 사람이 그리운 건지, 그림도 남지 않은 시절 풍경이 기억 속에서만 삼삼하게 유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