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 설날 풍경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옛이야기라기보다 지난 추억을 소환하려니 문득 김소월 님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가 떠오른다.
예전엔, 그래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엄마와 아버지가 설을 맞이하려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했다는 것을. 어쩌면 설을 쇠려면 한 달 생활할 곡식이며 돈을 써야 했을 터였다. 설이라고 싸구려 옷이라도 아이들 몫몫이 사야지, 자반고등어든 새치든 공치든 차례지낼 장봐야지, 두부 만들어야지, 전 부쳐야지, 떡 해야지, 준비하는 수고는 그렇다 치고 없는 돈 긁어모아 써야 했고, 있는 곡식 없는 곡식 한꺼번에 먹어치워야 하는 셈이었으니, 족히 한 달 먹을 곡식에 두세 달 쓸 돈을 서야 했을 터였다. 그러니 엄마와 아버지는 명절이면 얼마나 마음이 싸했을까, 그때는 몰랐다.
그냥 평소에 못 먹던 고등어나 새치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뭐 옷 선사 받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새 옷을 입을 수 있던 터라 오히려 새 옷을 입는 게 어색했다. 다만 먹거리가 풍성해서 설날을 기대했다. 집에서 설상으로 차린 음식이나 과자도 그렇지만 동네 어른들한테 세배하고 세뱃돈 받거나 사탕 받는 재미가 좋았다.
설날이면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차례가 끝나면 차례 음식으로 올라온 과자는 몫몫이 나누어 받았다.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건 엄마가 손수 만드신 약과와 다식이었다. 필수적으로 만둣국이 있었고 떡은 있었으나 옥수수떡이라 그다지 맛은 좋지 않아 기대하지 않았다. 차례 끝나고 아침을 먹고 나면 엄마 아버지한테 세배를 하지는 않았다. 쑥스러워서랄까, 몰라서랄까, 부모님한테 세배해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대신 얼른 아침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다가 동네에 세배를 나선다. 우선 가까운 집, 친구 집을 방문한다. 친구 부모님께 세배를 한다. 그 다음 그 친구와 함께 다른 친구 집으로 간다. 그렇게 꼬리를 달다시피 자연스럽게 동년배 친구들과 그룹으로 모여 다닌다. 그러니까 설날이면 자연스럽게 여러 팀이 집집마다 방문을 한다. 또래에 따라 세배 받는 집의 대접이 다르다. 어린 아이들에겐 과자나 사탕을 준다. 좀 나이든 청년들에겐 만둣국과 떡을 대접한다. 이미 지난해에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청년들은 음식 맛이 있는 집 또는 쌀떡한 집이면서 비교적 인심이 후한 집에 머물면서 대접을 받는다. 대접하는 측이나 대접받는 측은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 해마다 정해져 있는 셈이다. 나처럼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집 역시 따로 있다. 약과나 다식과 같이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주는 집 말고 세뱃돈을 주거나 사탕을 주는 집을 좋아한다. 그런 집에 가면 대부분 주실 때까지 기다린다.
세뱃돈 주는 집 한 집, 사탕 주는 집 한 집이 있었다. 지나가면서 빠뜨리는 집은 없었다. 어리지만 나름 계산을 했다. 해서 어느 집에선 만둣국을 얻어먹는다, 어느 집은 그냥 세배만 하고 얼른 일어선다, 이런 식으로 미래 공식처럼 되어 있었다.
대신 점박이 터 넘어 골짜기에 굉장히 큰집에 사는 할아버지 댁에선 세뱃돈을 받았다. 할아버지 혼자 사셨는데, 설날이면 할아버지는 세배하러 온 아이들에게 그때는 1원짜리가 지폐였는데 두 장씩 주셨다. 할아버지 이름은 몰랐다. 그냥 백 광주라 불렀으니 아마래도 광산에 다니셔서 돈을 좀 버신 분이셨던 듯싶다. 동네에서 가장 연세가 높으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쯤에 이사를 가신 걸 봐도 우리 동네에서 현금은 제일 많이 보유하신 것 같다.
그곳에서 쭈욱 다시 신작로 쪽으로 내려와 신작로를 건너서 산 비탈길을 올라가면 음지쪽이긴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담한 기와집이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그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사셨다. 권노인네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세배 온 아이들에게 비닐로 싼 사탕 두 알씩 주셨다.
그걸 받는 것으로 설날 세배는 끝나지만 사흘 정도 나누어 다녔다. 그래야 별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 사흘 정도가 세배 다니는 것으로 공식화되어 있다시피 했다. 어느 집은 남겨두었다가 그 집에선 윷놀이 하는 집이었고, 어느 집에선 만둣국 먹는 집이었다.
나는 착하기는 했지만 다분히 사기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이 많으니까 혹시 할아버지들이 기억을 못하실까 하여 세뱃돈 주는 백광주네 집에 다시 들린다. 천연덕스럽게 다음날 다시 세배를 간다. 그런데 백광주 할아버지는 딱 장부를 뒤적여서 알아차리고는 “어제 왔다 갔군.” 하면서 1원짜리 한 장 주신다. 권노인네 집엔 해마다 두 번씩 들리는데 설 지나고 삼사 일 후에 다시 친구 둘을 데리고 세배를 간다. 그러면 노인께선 어떤 해는 그냥 사탕 두 알을 주시지만 어떤 해에는 “설날 왔다 가지 않았나?”하고 물으신다. 그러면 천연덕스럽게 처음 왔다고 거짓말한다. 노인께선 고개를 갸웃하시곤 사탕 두 알을 주신다.
그때는 그랬다. 철이 안 들어서 좋았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와 아버지께서 설 한 번 지나노라면, 설 한 번 지내기 위해선 얼마나 아꼈다가 설을 쇠려고 희생하셨을지 전혀 생각 밖이었다. 다만 2원을 벌 수 있다는 것, 사탕 네 알을 받을 수 있다는 기다림으로 설레었다.
그때 동네에서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들은 백광주 그리고 권노인 두 분,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떻게 생기셨는지 확연하게 기억은 나지는 않지만 백광주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멋쟁이셨으며 서양적이셨다는 것, 권노인은 키가 비교적 작고 한국적인 할아버지셨다는 것은 기억난다.
지난날을 되새김하면서 때로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은 한다. 그때 그렇게 살았던 게 좋았다는 건 아닐 게다. 다만 지금보다 순수했다는 것,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 그것이 좋았을 뿐이다. 하얀 눈길을 푹푹 디디면서 세배를 다니던 동네 아이들, 그 아이들 중에 나도 섞여 있다. 어쩌면 꾀죄죄한 코흘리개 아이들 중 한 아이. 거기 그렇게 있던 내가 이젠 징그럽게 변한 어른, 딱 한 번이지만 어르신이란 소리를 들은 나, 또 딱 한 번 ‘정정하시네요’란 소리를 들은 나는 여기에 있다. 그때 그 시절의 엄마와 아버지보다 나이 더 든 내가 여기에 있다.
“엄마 그리고 아부지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