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5- 코로나19가 불러낸 기억들
과거의 소환이랄까, 과거 기억의 소환이랄까, 굳이 일부러 떠올리지 않아도 가끔 누구나 추억을 떠올린다. 기억의 창고 속에 콕 박혀 있던 기억들은 때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오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떠오른다.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부른다. 누구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산다. 현재는 과거를 만나는 순간이며 미래를 만나는 접점이다. 현재의 사건이나 상황이 과거를 소환한다는 의미이다. 잊고 있던 일이 문득 떠오르는 때가 있다. 현재에서 그 무엇을 만났을 때면 문득 유사 상황이거나 연관 있는 무엇이 떠오른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는 상시적으로 만난다. 때문에 지금의 나는 과거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
요즘 코로나19가 난리를 부른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이는 수년 전에 상영된 <감기>를 떠올릴 테고, 책을 좀 읽은 이들이라면 카뮈의 <페스트>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지금보다 좀 더 악화된 상황이 <페스트>를 닮았기 때문이다. 봉쇄거나 폐쇄된 공간을 상정한 소설 <페스트>는 더 거슬러 올라간 질병의 시대, 페스트의 원조를 다시 소환한다. 내가 경험했건 그렇지 않았건 기억은 체함의 기억과 간접 기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세에 유럽의 상황을 아주 혁명적으로 바꾼 페스트, 시체가 검게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는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서 처음 발병한다. 그런데 1347년 킵차크 군대는 크림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한다. 이들은 잔인하게도 노포로 페스트로 죽은 시체들을 장전하여 도시를 향해 쏘아 보낸다. 그 바람에 페스트는 유럽인들에게 전파되었는데, 지중해 항구들로 퍼져나간 페스트는 1347년 시칠리아, 1348년 북아프리카·이탈리아·스페인·영국·프랑스, 134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독일, 베네룩스 3국, 1350년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해의 국가들에까지 퍼져나간다. 흑사병은 1361~63, 1369~71, 1374~75, 1390, 1400, 1664~65년에 다시 유행하면서 많은 사망자를 낸다. 피해는 지역마다 균등한 것이 아니어서 밀라노 공국, 플랑드르, 베른 같은 지역에서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반면, 토스카나·아라곤·카탈루냐·랑그도크 같은 지역은 피해가 특히 심했다. 당연히 그때에도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전염이 많았다. 치사율이 낮은 곳은 인구의 1/8로 상황이 덜 심각한 지역도 있었으나 심한 곳은 2/3나 피해를 당한 지역도 있었다. 이때엔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세월이 갈수록 인구는 늘게 마련인데, 영국의 경우 1300년대의 인구가 페스트를 겪고 난 1400년 경우는 오히려 인구가 100년간에 절반이나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1,000개 마을이 피해를 입었고, 마을 전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만 2,500만 명이 페스트로 사망했으며, 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1348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니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300년 후에 영국 런던에서는 다시 크게 유행하여 인구 46만 명 중 7만 명이 사망했다.
19세기 중 후반에 중국의 광쩌우 지방과 홍콩에서 디시 유행하여 1894년에 사망자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후 20년 동안 중국 남부지역의 항구를 통해 전 세계, 이를테면 판데믹으로 퍼져 1,000만 명이 사망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 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경작지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때문에 많은 지주들이 파산했다.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집세로 대신하거나 임금을 주어야만 했다. 반면 기술자와 소작농의 임금은 상승했다. 그야말로 대혁명이었다.
비록 농촌이라고 해서 유행병의 예외는 없었다. 나 어렸을 때 역시 많은 유행병이 돌았다. 아폴로 눈병이 돌았다. 마마가 돌았다. 그게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물론 유행병이 지금보다는 덜 심각했을 터였다. 글로벌 시대인 요즘이야 사람들의 왕래가 지역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니 어디서 기침을 하면 세계 곳곳에 침이 튀긴다 할까, 한 사람이 하품을 하면 온 세계가 함께 하품을 한다고 할까, 툭하면 판데믹의 시대가 올 수 있다.
지금에 비하면 그때, 특히 시골에선 왕래가 드물었기 때문에 유행병이 덜하긴 했으나 돌긴 돌았다. 하지만 피해는 비율적으로는 더 심했다. 민간요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앓다가 죽었다.
유행병이 아니라도 죽는 아이들이 많았다. 밤나무 장작을 땐 불을 화롯불에 감아 방안에 두었다가 골머리를 앓아 죽는 경우도 있었고 배앓이로 죽기도 했다. 이렇게 나이 들어 죽기도 했지만 태어난 지 일 년도 못 채우고 죽는 아이도 꽤나 있었다. 때문에 아이가 탄생하면 일 년 동안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한 돌을 지나고도 살아 있으면 호적신고를 했기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한 살 어린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나 역시 호적상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한 살 어리니까. 그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학교행정도 정확하지 않았던 듯, 초등학교 성적표나 졸업장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실제 나이였는데, 내 주민등록상의 나이보다 한 살 위였다.
1년도 못 살고 죽는 아이들, 불행이라고 해야겠지. 그럼에도 생명인지라 아이가 죽으면 아이는 적당한 곳에 묻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 일을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들이 하기엔 어려웠다. 대신 이웃 누군가가 그것을 해주어야 했다. 그럴 때면 무엇이든 남이 부탁하면 거절을 못하는, 착하디착해서, 어쩌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대신하셨다. 아버지 손으로 묻어준 아이들이 꽤나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그 덕분에 내가 그런 대로 잘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유행병이 부른 기억이 아버지까지 불러냈지만, 어려서부터 나이 들기 까지 매 한 번 못 드렸던 마음 약한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에겐 가난이란 역설적인 선물을 고스란히 안겨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삶이 지금 와 생각하면 많이 아프다. 아버지의 유산은 3만원이었으니까. 왜 기억하건데 먼저 이렇게 닳고 찌그러진 우중충한 이야기만 떠오를까. 다음엔 저절로 떠오른 기억이 아닌 재미난 기억을 의도적으로 떠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