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7- 반장은 아무나 하나?

영광도서 0 537

우리 부모님은 글이란 전혀 모르셨다. 학교 문턱에 간 적이 없으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왜정시대를 사셨음에도 심시산골에 사셨기 때문에 누구나 아는 변또니 와니 그런 말 외에는 일본어도 전혀 모르셨다. 창씨개명도 필요 없었다. 최소한 쓰고 읽고 덧셈 뺄셈 나눗셈 곱셈만 알면 된다고 하지만, 부모님 모두 쓰기도 읽기도 마음대로 못하셨으니 말해 무엇하랴. 때문에 자식들이라도 공부를 꼭 시켜야 한다는 그런 마음은 아예 없으셨다. 속으로는 몰라도 겉으로는 최소한 그랬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심산골, 화전민촌에선 효도라는 게, 사람다움이란 게, 잘하면 초등학교 졸업장 따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농사일이나 잘 도우면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동네에 글이라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나와 제대로 쓰고 읽으면 그 분이 동네 반장을 하거나 이장을 했다. 그것도 벼슬은 벼슬인지라 반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어서 선거를 했다. 선거운동이야 하지 않았지만 전주민이 반회를 하여 반장을 투표로 뽑았고, 이장은 선거운동도 좀 해서 하루 날 잡아 중간 마을에서 모여 투표로 이장을 뽑았다.

 

반장으로 뽑히면 동네에선 반장님으로 통했다. 제법 명예였다. 이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장 밑에 이서기만 하더라도 제법 행세를 할 정도였다. 최소한 반장이라도 하려면 한글을 읽고 쓰긴 해야 했으니까. 반장 호칭 아무나 듣는 건 아니었다. 나라에서 월급이 나오는 때는 아니었으나 반장 수당은 동네에서 가구당 옥수수 두 가마씩 걷어 주었다. 반장이 맡은 일 또는 권한은 반 내에서 필요한 외상 농약이나 비료 구매였다. 당시엔 농협에서 외상으로 비료와 농약을 구할 수 있었다. 외상으로 이른 봄에 현물을 주고 가을에 모곡을 하면 그때 갚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넉넉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 턱 없이 부족했다. 씨앗조차 없는 마당에 그나마 외상으로 농약이나 비료를 탈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반장의 권한은 제법 셌다. 게다가 그것을 받아서 갚는 역할을 반장이 해야 했으므로 아무한테나 외상 농약이나 외상 비료를 주지 않았고, 가난한 집은 최소한으로 주었다.

 

우리는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라서 외상 농약도 외상 비료도 턱없이 부족하게 받았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사채를 내야 했다. 사채라는 것은 돈으로 빌리는 것이 아니라 곡식으로 값을 쳐서 돈을 빌리고 가을이면 갚는데 그야말로 고리대금에 가까웠다. 예컨대 옥수수 한 말을 봄에 빌리면 가을엔 옥수수 한 말 반을 갚는 식이었다. 농협에서 돈을 빌린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담보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증을 세워야 했는데, 그것도 끼리끼리인지라 농협 돈을 빌리는 건 꿈도 못 꾸었다. 사채에 의존해야 했다. 게다가 가을에 갚지 못하면 그 이듬해로 이월해 갚으려면 복리계산이니 한 말인 것이 두 말 반에 반을 갚아야 해서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렇게 부익부빈익빈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권력이라면 권력이었다. 소위 마을유지라는 사람들은 반에 배당된 농약도, 비료도 많이 받아서 충분히 농사를 잘 지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들은 심히 어려웠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그런데다가 웬 자식들은 그리도 많이 낳았던지. 그런 권력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농협에서 나오는 저리의 돈을 독차지했다. 영농자금이니 뭐나 명목상 나오면 그 모두는 가난한 사람 몫으로는 전혀 오지 않았다. 그 돈을 대출받은 부자들이 명목상으로만 자기네가 기르는 소를 그 돈으로 산 것으로 하고, 그 돈은 다른 데 썼다. 때문에 부자들은 대출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 부자가 되는 반면 가난한 사람은 굶고는 살아도 빚은 없었다. 그때는 그런 게 없었지만 농가부채탕감정책이란 게 있었더라면 결국 약자라서 가난해서 대출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겐 전혀 혜택이 없는 셈이었다. 권력이란 게 약자를 보호하는 듯한 겉치레는 하지만 속을 알고 나면 강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다못해 반회에 가도 대우를 못 받으니 반회에 가는 걸 아버지는 무척 꺼리셨다. 그렇다고 아무도 안 가면 외상 농약이나 외상 비료 배부할 때엔 그나마 더 불이익을 당하니 누가 가긴 가야 했다. 외상 농약과 외상 비료 책정하는 반상회였다. 여자는 재수 없다는 때라 남자만 가야했는데, 아버지는 안 가시겠다 하셨다. 작은형도 안 가겠다고 고집이었다. 그러자 엄마에겐 만만한 게 나였다. “너라도 가야지 어떡하니.”하시는 데 안 갈 수 있으랴. 초등학생인 내가 반회에 갔다. 발언권도 없었다. 지들끼리 회의해서 우리 몫을 통보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뭘 안다고 괜히 눈물이 흘렀다. 반장 집에서 집까지 오백여 미터는 될 텐데 그 길을 오면서 많이도 울었다.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뭔들 안다고 서러웠는지 몰라도 많이 울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권력이란 말은 아주 싫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아주 부정적이다. 모두 그렇고 그런 놈이지 한다. 그들만의 리그가 따로 있고 우리만의 리그가 따로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서민 위한다 하지만 자신을 툭 털어서 나누어줄 반장이, 이장이, 면장이, 군수가, 도지사가, 장관이, 대통령이 있을까?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야말로 서민으로 돌아가서 땅콩농사나 지으면서 살되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을 인물이 있을까. 그들이 아무리 이미지가 좋아도 믿지 않는다. 반칙 없는 사회, 정의로운 사회,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런 사회가 오긴 올까? 오긴 오겠지.

 

지난 일을 돌아보려니 부정적인 게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쓰련다. 이 또한 나 사라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때 풍속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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