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4-예배시간에 방귀가 나오면?
가끔 교인이라는 게 떳떳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 자신이 진정한 종교인으로서의 자격이라면 자격이랄까, 그것도 안 되는 면도 있다만, 나를 성찰하면 온갖 부끄러운 점이 많긴 하다만, 나 말고도 소위 유명인사들의 순수하지 못한 오염된 언행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을 때면 나 역시 부끄럽다. 그만큼 기독교인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기적인 면이 제법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적어도 종교지도자들은 지금의 종교지도자들보다 훨씬 순수했다. 일단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소명의식이 우선이었고, 교인들을 향한 책임감이 남달랐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믿는 척하기보다 실제로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소견이긴 하다만, 또는 사회에서 보는 시각에서도 이전보다 신뢰를 주지 못하고, 목사의 소명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세습 문제도 그렇고, 이러저러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일들이 가끔 뉴스를 통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게 그냥 편견만은 아닌 듯하다.
어릴 적에 내가 다닌 교회엔 목사님이 없었다. 어쩌다 전도사님이 오셔도 2-3년 지나면 떠나곤 했다. 아마도 목사 수업의 연한을 위한 통과의례로 스쳐갔을 터였다. 그리곤 교회에 딸린 사택과 토지를 이용하는 대신 교회를 맡은 분이 권사님이었다. 따로 월급도 없었다. 헌금을 받는다고 해도 고작 반찬값도 안 되는 정도였다. 순수하게 농사를 짓는 소수의 교인들이 때때로 특별한 음식인 떡이나 팥죽을 쑤면 가져다 드리는 게 전부였다. 때문에 교회를 담당하는 전도사님이든 권사님이든 직접 농사를 짓다가 새벽기도 시간이나 예배 시간을 인도하고 설교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교인들을 인도했으니, 진정한 목자들이었다. 교인들이 거의 무학이라 특별히 설교준비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했을 터였다. 그만큼 순수 신앙시대였다. 목회자도 교인도 순수했던 시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교인들은 믿을 만하다, 그런 때였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게 부끄럽다. 물론 하나님이 타락한 것도, 종교자체가 타락한 것도 아니다. 이에 속한 사람들이 타락한 것일 뿐. 요즘은 교인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 지식수준으로는 목사님들 못지않거나 그 이상인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목사님들 중 공부를 별로 안 하는 이들이 제법 있는 듯싶다. 소위 들어볼 만한 내용이 없는 설교보다는 차라리 성경을 읽어주고 교인들 스스로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게 더 순수하지 않을까 싶을 때도 많다. 잘못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자칫 사이비가 될 수도 있고, 대강 해석하면 들어볼 내용이 없는 설교가 될 테니 말이다. 이러고저러고 떠나서 순수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마을 교회에서도 속회예배(장로교에서는 구역예배)를 매주 드렸다. 도시에선 교인들이 많으니 같은 교회 내에 여러 구역 또는 여러 속회가 있지만, 우리 마을에선 속회는 하나였다. 딱 금요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번 가정을 방문하여 권사님이 예배 인도를 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해야 했으므로 예배는 꼭 저녁에 드렸다. 그것도 딱 시간을 정한 것이 아니라 일단 어두워져야 하고, 다음엔 올 사람들이 거의 모여야 했다. 전화도 없지, 집들은 멀리 멀리 떨어져 있지, 그러니 연락할 도리가 없기에 때로는 밤늦도록 기다렸다. 그럴 때면 대력 견적이 나왔는데 늘 마지막에 참석하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그 분이 드디어 도착해야 예배를 시작했다. 어쩌다 안 오는 이들이 있으면 대략 감이라는 게 있었고, 그 감은 거의 들어맞았다. 우리 교회에 믿는 가정이 열두어 가정 뙤었으니, 속회는 서너 달 만에 한 번 돌아왔다. 그 날은 비록 가정 형편은 어려워도 예배를 드리러 오는 이들을 위하여 특별 식을 준비했다. 물론 거의 예배를 마치고 밤중 가까이 되어야 식사를 했다.
나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우리 집에서 속회 예배를 드렸다. 모처럼 먹을 수 있는 특별 식을 먹으려고 잠을 참으며 예배 끝나기를 기다렸다. 찬송 부르고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할 집사님을 권사님이 지목하셨다. 그때는 누가 기도하든 이러고저러고 아주 사연이 길었다. 한창 기도를 하는 중에 교인 중 한 분이 방귀가 나왔나 싶었다. 문제는 조용하게 한 분의 목소리만 울려퍼지는 기도시간인지라 사뭇 조용했다. 그런데 한 분이 방귀 소리를 들킬까봐 억지로 참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나 보았다. 방귀를 참는다, 웃음이 나온다, 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웃음 참느라 방귀가 그에 맞춰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빵하고 터치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참다 보니, 아무리 애써도 큭 하는 웃음소리 대신 방귀가 간헐적으로 새 나오는 뽕 뽀르르봉, 뽕 뽀르봉 뽀뽀뽕 묘한 방귀소리가 방안의 고요를 깼다. 냄새는 둘째 치고, 모두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지만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교인들의 웃음소리에 기도도 길을 잃었다. 웃음을 참느라 몸마저 흔들리는 교인들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 역시 성스러운 예배시간에 불경스러운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가리고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했다. 그만큼 순진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궁금하여 하나님도 속일 요량으로 손가락 사이로 빠끔하게 가늘게 눈을 뜨고 범인이 누구인지 살폈다. 누가 범인인지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더 우스웠던 건 예배를 인도하는 권사님도 교인들도,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봐 억지로 눈을 감은 채,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기도 시간엔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
모두들 순진한 신앙, 아니면 아주 순수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을 살짝 속인 건 나밖에 없었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웃음을 억지로 참았던 어른들, 상황이 너무 궁금하여 눈을 뜨고 싶은데 뜰 수 없어서 눈두덩을 실룩거리면서도 억지로 참던 어른들, 참으로 참한 신앙인들이었다. 는 참느라 애썼던 그때, 그래 그때만 해도 난 참 순진하다면 순진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나는 교인들을 속였다. 고개를 숙였으니, 게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가렸으니 하나님한테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나는 하나님마저 살짝 속였다. 그런데도 왜 예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일까. 아마도 나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아이답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솔직히 고백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대표기도 시간에 앞에 나가 마이크 앞에서 기도를 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 궁금하여, 살짝 눈치껏 눈을 뜨고 살펴본 적이 있다.
어떻게 저렇게 술술 잘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분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마이크에 입을 대면서 종이에 적은 걸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나는 궁금증을 풀었다. 아무래도 나는 호기심이 병인가 싶다. 어렸을 때건 어른이 되어서건 나는 요놈의 호기심을 이기기 힘들다. 모두들 순수하게 그냥 기도에 열중하는데 나는 그런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는 게 병이라고, 지금은 감히 설교를 들으며 ‘들을 게 없네, 목사님이 공부 좀 했으면 좋겠네’ 하고 건방 떨고 싶은 마음이 이는지,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무척 힘들다. 가끔 그때 그 시절의 순진한 어른들을 닮고 싶다만, 호기심과 오만 때문에 나는 그게 무척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죄스럽고, 사람들에겐 부끄럽다. 교인이라고 드러내기도 참담하고 부끄럽다. 요즘 잘나가는 분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순지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한 나 자신 때문이다. 정말 순진하지는 못해도 순수하고 싶다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