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7-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

영광도서 0 485

힌두교엔 카스트제도가 있어 부모의 출신성분 그대로 평생을 살도록 되어 있다. 브라만의 피를 받았으면 그는 평생 브라만 계급으로, 크샤트리아 출신이면 크샤트리아로, 바이샤 출신이면 바이샤로, 수드라 출신이면 수드라로, 적어도 현생에선 그 계급으로 산다. 사회적 계급 결정론이라 할까.

 

이와 거의 유사한 세계를 설정한 소설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이 세계에선 태내생식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수정란으로 부화를 시키되 자연적이 아니라 조작한다. 수정과정에서 난자 하나에 한 사람을 만들면 정상아로 알파계급이나 베타계급이다. 나머지 그 이하의 계급 감마, 델타, 엡실론은 수정란 하나에서 96개의 성체가 나오도록 하여 신체 자체가 다르도록 조작한다. 당연히 알파와 베타는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아이로 나오지만, 나머지는 신체 자체가 아주 작은 성체로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나와서 사회에서 해야 할 일에 딱 적응하게 위한 방법으로 형액 량이라든가 산소공급 량을 조절한다. 쉽게 말해 맞춤형으로 만들어낸다. 태어난 대로, 조작되어진 대로 일생 동안 변동 없는 신분으로, 변동 없는 일을 하다 세상을 마감한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결정론임과 동시에 사회적 결정론을 기반으로 한 신세계라 할 수 있다.

 

문명 세계로 지칭된 신세계에선 조작된 그대로 변동이 없다. 달리 말하면 개천에선 미꾸라지만 살 뿐 용은 없다. 용은 이미 용이도록 결정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의 신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요즘은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불가능한 듯 보인다. 그만큼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느냐, 어느 계층에서 태어났느냐가 보다 중요한 듯하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으면서, 다만 피상적으로만 신세계의 표어 공유, 균등, 안정을 내세웠듯, 다른 표어로 살짝 바꾸어 내세운 세계와 무엇이 다르랴 싶다.

 

오히려 소위 ‘나때’는 지금보다 ‘개천에서 용 난다’ 그게 가능했다. 삶의 조건이 지금과 달리 대부분 고만고만했다. 물론 그때도 도시와 농촌의 삶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심했다. 도시에선 가난해도 교육의 혜택을 똑같이는 아니라도 농촌의 아이들보다는 훨씬 쉽게 받았을 터였다. 그걸 빼고는 농촌의 아이들, 적어도 나 살던 곳에선 고만고만했다. 우리 학년은 처음 1ㅣ학년 때는 49명이었으나 졸업할 때는 47명이었는데, 그나마 중학교 진학한 친구들은 7명밖에 안 되었으니까.

 

공부, 공부 따위는 학교에서 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 하나 그것을 기피한다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 거려니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공부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학교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모심는 날이거나 타작하는 날이면 미리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결석을 해도 출석으로 인정해주었다. 당연히 그날은 학교 안 가는 것이 관례라면 관례였다. 그럼에도 학교에 간 아이들은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조퇴를 신청하면 군말 없이 조퇴는 당연했다.

 

그때는 모심는 날이거나 타작하는 날은 가족 단위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 집 모내기를 했다. 품앗이였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이런 식으로 모내기 날의 일정을 동리 사람들이 협의해서 정했기 때문에 그런 날은 필시 그 집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소위 모심는 날이요 타작 날이었다. 당연히 내내 옥수수밥만 하다가 그날은 어떤 수단으로든 쌀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을 돕는 것, 심부름하는 것이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신났다.

 

어린 아이들이 무엇하랴만 모심는 날이면 아이들은 모 심부름을 했다. 어른이 논두렁 중간 중간에 모를 날라주면, 아이들은 논바닥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일정한 공간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못단을 놓았다. 그러면 용케도 논에 심는 모의 양이 얼추 맞았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엄마가 새참이나 점심을 내올 때 막걸리 주전자를 들거나 음식을 들고 오는 일을 거들었다.

 

타작하는 날에는 와롱와롱 거리는 탈곡기 옆에 볏단이 줄어들 때마다 볏단을 채우거나 볏단을 들어 어른들이 탈곡기에 쉽게 대도록 도왔다. 아니면 뒤로 던져진 볏단을 치우는 일도 아이들 몫이었다. 막걸리 주전자라도 나르거나 했다.

 

그때는 그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생각했다만, 지금 아이들을 보면 아주 작고 어린 아이였는데 그때는 그럼에도 대견스럽게 어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공평했다. 덕분에 나때는 한 번 공부 잘하는 애들은 끝까지 잘했다. 못하는 애들은 거의 끝까지 못했다. 노력보다 타고난 대로 출력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발생이라면 자연발생, 유전이라면 유전 그대로 살았다.

 

조작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타고난 머리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 환경에 더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못해도 할 수 있도록 투자를 하면, 소위 조건반사를 시키면, 보다 잘할 수 있다. 자나 깨나 공부하게 하면 공부를 보다 잘할 수 있다. 아니면 피아노를, 아니면 그림을, 아니면 노래를 잘할 수 있다. 반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면,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유전,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유전, 아무리 어떤 특별한 유전을 이었다 해도, 그것을 발현해 보지 못하므로 그런 재능이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사는 이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전에 보다 훨씬 평준화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삶의 질은 훨씬 나아졌을 수는 있어도 사회적 신분은 오히려 균등화, 평준화 되어 있으나 변동이 없는 카스트제도화 되는 듯하다.

 

어쩌면 그들만의 리그가 있어서 사회적 계급의 조작이 가능하고, 어쩌면 그들만의 환경이 있어서 환경적 조작이 가능한 세상이 요즘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는 ‘나때’가 보다 공평한 사회가 아니었을지. 지금이 딱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면 내가 살던 그때는 존이 살던 야만인 보호구역이 아닐까 싶다. 어떤 세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문득 오늘 아침엔 모심던 날 모내기 심부름을 하면서 쌀밥이 나올 점심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날의 일하던 동네어른들의 모습이며, 머리에 점심을 이고 나오시던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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