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2- 그늘은 없을수록 좋지!

영광도서 0 524

“나는 그늘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읊었더라만, 나는 오히려 그늘 없는 사람이 더 좋다. 그야말로 이 풍진 세상에서 고생하면서 생긴 그늘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다 그것을 극복하고 해맑게 사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늘이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그늘을 덮는다. 모진 시집살이를 한 사람이 며느리를 애틋하게 사랑하기보다 며느리를 더 괴롭히듯, 힘든 군대생활을 한 상사가 부하를 애틋하게 아끼기보다 부하를 괴롭히는 요령을 배우듯, 인간은 때로 부정적인 성향이 있는 법이다. 때문에 나는 그늘 있는 사람보다 그늘 없는 사람이 좋다. 물론 때로 인생이 고달파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늘 없이 산 사람은 쉽게 쓰러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늘은 그늘을 낳는다.

 

엄마는 열넷에 시집을 오셨다고 했다. 시집갔다가 쫓겨 오면 도끼로 발등을 찍어버리겠다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고스란히 믿은 엄마는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정이 그토록 그리웠으면서도 시집에서 탈출할 꿈도 꾸지 못하셨단다. 열넷이면 어려도 한참 어릴 터이지만 ‘지독한 시어머니는 절대로 봐주는 적이 없었고, 모진 일을 시켰고, 온갖 욕설에 온갖 체벌에 공포 속에 사셨다’ 했다. “그래도 내가 너희 집 귀신이 된 건 할아버지 덕분이었어.”라며 가끔 시집살이를 떠올리셨다.

 

엄마의 이야기인 즉, 아버지는 엄마보다 일곱 살 위셨다. 아버지는 삼형제였는데, 일제 때 할아버지께서 만주로 들어가신 후 소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소식만 이때나 저때나 기다리던 할머니는 열 살의 큰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보냈고, 일곱 살 아버지는 엄마가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한 우리 집에 양자로 주시고는, 네 살 막내아들만 업고 할아버지를 찾겠다며 만주로 가신다고 한 후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 낳으려고, 할머니 말고 앞 못 보는 할머니를 씨받이로 들였으나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해 아버지를 양자로 들인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양자로 오셨을 때, 아버지보다 한참 위인 고모가 계셨는데, 고모 역시 수양딸로 삼은 분이셨다. 고모도 일찍 시집가서 엄마가 시집살이할 때는 함께 살지는 않으셨다. 대신 근처에 살아서 고모가 낳은 아들들이 자주 놀러왔는데, 엄마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다고 하셨다.

 

외증조할아버지는 마을 훈장이셨는데, 독립운동을 하신다며 중국으로 건너가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셔서, 서산 해미 마을에선 공적비를 세워주기까지 했으나 근거를 찾지 못해 인정을 받지는 못하셨다며 아쉬워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영향을 받으셨는지, 정착을 못하고 떠돌아다니셨다. 그 때문에 외할머니는 맏딸인 엄마를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셨다고 했다.

 

아무리 영특하다고 한 들 ‘열네 살밖에 안 된 엄마가 얼마나 일을 잘하랴, 그럼에도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괴롭혔다’ 고 하셨다. “그나마 니 할아버지가 그때마다 아가 힘들지 하시면서 다독였단다. 눈 먼 작은 시어머니는 아주 착하셔서 모진 말을 한 번도 못하셨어.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는 그때마다 둘이 붙잡고 울곤 했단다.”하셨다.

 

“하루는 디딜방아를 찧는데, 글쎄, 고모네 생질들이 방아를 디뎠고 나는 방아확에서 튀어나오는 곡식을 밀어 넣는 일을 했는데, 생질들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방아확에 손이 들어 있는데 방아공이가 내려와 손을 치는 바람에 손을 찧어서 피가 줄줄 나왔지 뭐니. 그랬더니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찧었다며 구박을 했단다.”고 회상하셨다.

 

이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디딜방아, 양쪽 갈래진 참나무로 디딜방아를 만든다. 마치 사람이 엎드린 모양이다. 머리부분에 구멍을 뚫어 방아공이를 달고, 그 끝에 쇠로된 마개를 씌운다. 그 굉이 아래엔 돌로 그릇모양으로 한 방아확을 땅에 파고 묻는다. 공이가 오르내리면서 방아확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곡물을 가루로 만들거나 껍질을 벗긴다. 중간엔 굄 장치를 만들면 갈래진 부분을 발로 밟으면 머리부분이 오르내리는 구조이다. 갈래진 발판을 두 사람이 밞고 놓기를 거듭하면서 방아를 찧고, 아낙네는 방아확 근처에 앉아 보조를 맞추어 튀어나오는 곡물을 밀어 넣고 꺼내기를 한다.

 

그토록 모진 시집살이를 한 엄마의 삶은 어느 하루도 찡하고 해 뜬 날이 드물었다. 늘 그늘이었다. 어려서는 시집살이로 고생하셨고, 나이 들어서도 살림은 펴지지 않아 살림살이로 고생하셨다. 누나들을 어린 나이에 식모로 서울 살이를 보내시는 아픔을 겪으실 만큼 늘 가난을 짊어지고 사셨다. 그것도 모자라 빚을 감당 못하고, 큰누나를 열여섯 살에 시집을 보내셨다. 세월이 흘러 엄마도 며느리들을 들였지만 한 번도 시집살이를 시키시지 못하셨다.

 

그냥 그늘 아래 살다가 그늘 아래서 세상을 떠나신 엄마, 어쩜 인생이 꼬여도 그렇게 꼬였을까, 어려선 시집살이로, 나이 들어선 가난으로, 자식농사로 하룬들 한 시간인들, 제대로 맑은 날 없이, 늙어서도 엄마 잃은 손자들 키우느라 평생을 일을 놓지 못하신 엄마, 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30년 동안을 이롭게 사시면서 손자들 밥해주시고, 챙겨주셔야 했던 엄마, 마지막 한 달만 남의 손을 의지하셨던 엄마의 그늘, 한 번 드리운 그늘은 평생 따라다니는 건지도 몰라, 나는 그늘 없는 사람이 더 좋다. 이젠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손에 물 안 묻히고 사시려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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