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4- 큰누나 시집가던 날!

영광도서 0 466

모르는 게 약이다. 모르면 슬픈 일도 슬픈 게 아니다. 슬픔도 기쁨이다. 기쁨은 더더욱 기쁨이다. 때문에 철없던 시절이 많은 추억으로 남는다. 철들어 생각하면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기에 철없음이 부끄러워 기억에 남으니, 그걸 추억이라 부른다. 내가 아프지 않으니 놀이 같고, 내가 즐거우니 잔치 같던 일들, 때문에 어린 날은 동화 같은 수채화로 남는다.

 

지금도 생생하다. 큰누나 시집가던 날이. 내겐 너무 착한 큰누나가 있다. 그럼에도 큰누나와의 어려서의 기억은 거의 없다. 큰누나는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 대신 서울에 식모살이를 갔기 때문에 함께 지낸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철도 모르는 나이에 서울 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생각은 감히 못했다. 큰누나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어쩌다 만나도 우리 식구가 아닌 듯이 서먹서먹했다.

 

그랬던 큰누나는 열여섯 나이에 시집을 갔다. 다행히 서울에서 주인을 잘 만나서 주인집에서 학교도 보내주면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다는데, 살림이 어려워 불러 내렸다 했다. 큰누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집에 왔다. 착하디착했던, 큰누나는 이미 부모님이 정한 혼처에 따라 시집을 가야 했다. 농촌에서 고생하느니보다 비교적 괜찮은 식모살이를 접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다. 옥수수 두 가마니 때문이었다 했다.

 

서울에서 내려와 지내는 동안 급하게 사주단지가 오갔을 터였다. 서둘러 결혼식 날짜가 잡혔을 터였다. 우리 집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집, 백우산 고개를 넘어가면 있는 불당골에 시댁이 있었다. 내밀한 사정은 기억에 없고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결혼식 날 풍경이다.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이 참 많이 모였다. 우리가 광암리에 처음 이사 온 집엔 마당이 둘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안마당이 있었는데 넓지 않았다. 대신에 굴뚝이 난 쪽으로 조금 더 넒은 옆마당이 있었다. 타작을 할 때는 옆마당에서 주로 했다. 결혼식은 안마당에서 있었다. 그야말로 구식이라 불리던 결혼식이었다. 모두들 흥겨운 모습들이었다.

 

전통 양식에 따른 혼례, 누군가 사회자가 있었고, 매형은 신랑 복장, 큰누나는 연지곤지 찍은 신부 차림, 그리고 닭을 붙잡고 있다가 날리는 절차, 그리고 입맛을 다시게 만들던 울긋불긋한 사탕이 올라앉은 높은 교자상이 기억난다. 신랑신부의 맞절이 생각난다.

 

요란스러운 결혼 예식이 끝나고도 울긋불긋한 사탕이 눈앞에 뱅뱅 돌았다. 옆마당엔 멍석이 펼쳐졌다. 동네에서 얻어온 멍석들로 옆마당은 채워졌다. 동네 사람들은 옆마당에 둘러앉아 국수를 마시며, 막걸리를 마시며 왁자지껄했다. 흥겨운 잔치마당이 벌어졌다. 작은형과 나는 옆마당과 안채의 경계인 굴뚝이 올라간 황토 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 굴뚝을 만드느라 생긴 굴뚝 주변 공간은 양지쪽인데다 잔칫날이라 종일 불을 때서 바닥이 따뜻했다. 거기에 앉아 있으려니 어떤 동네아주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울긋불긋한 사탕 하나씩을 갖다 주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천상의 맛이었다.

 

점심나절쯤 결혼식은 끝나고 큰누나는 울긋불긋한 사탕 색을 닮은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당시엔 신부 아버지가 사돈댁까지 결혼식 날 다녀오는 풍습이 있었나 싶었다. 저녁나절 아버지는 돌아오시는 길이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우리 집 건너편 신작로 아래에 갈대밭이 있었는데, 모처럼 깨끗한 하얀 한복차림에 중절모자로 멋을 낸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셨는지 큰누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오시는 모습이었다. 엄마는 주책이라면서 작은누나와 우리를 불러서 동네 창피하니까 얼른 모셔오라 시키셨다. 아버지를 마중나간 우리는 비척이면서 여전히 큰누나 이름을 부르면서 울부짖으시는 아버지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옆에서 부축하면서 집으로 모셔야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섧게 큰누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셨는지 몰랐다. 술이 취하셔서 그런가 싶었다. 그다지 즐거운 결혼식이 아니었을, 마음 아프게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이었을 부모님, 그나마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려서 마음에 응어리진 가난을 푸셨을 테지만 마음 깊은 엄마는 혼자 마음으로 삭이면서, 어쩌면 혼자 남 몰래 우셨으리라. 울긋불긋 사탕에 과자를 얻어먹는 재미에 즐거워했던 철없는 나에겐 지금도 그 결혼식은 아련한 추억의 영상물처럼 어린다. 멋을 부린 중절모를 쓰고 하얗고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으신 아버지께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큰누나 이름을 부르시면서 갈대밭 옆길로 오시는 모습이 영상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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