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96- 아름다운 나의 선생님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짐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서러워라 무거운 짐조차 지실까.”
정찰의 시조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반드시 늙는다. 그 길 따라 나도 간다. 너도 간다. 우리 모두가 간다. 어림에서 젊음, 젊음에서 늙음, 이 행로를 따르는 이들을 차례로 한 줄에 세운다면, 나 하나의 삶의 전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겠다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다.
한때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금기도 없고, 금지 당할 무엇도 없이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금지된 것이 오히려 더 늘었다. 몰랐던 것들을 알면서 하고 싶은 것들 역시 많았고, 그 대신 금지당한 일들이 더 많았다.
그때쯤엔 더 어린 날이거나 더 젊은 시절로 돌아가 다시 살아봤으면 싶었다. 젊은 날이 그리웠다.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하니 지난날들이 아쉬웠다. 하지 못한 일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이제는 다시 할 수 없는 일들, 이를테면 낭만적인 사랑도 그렇고, 꿈꾸었던 일들이 그랬다. 그러면서 나보다 어린 이들이 부러웠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살았고, 지난날들을 아쉬워하며 살았다.
참 묘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지난날이 아니라 앞날을 바라보며 산다. 나보다 앞서 살아가는 이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며 산다. 저 산에 곱게 익어가는 나뭇잎들, 울긋불긋 온 산을 아름답게 그림으로 만들며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나뭇잎들처럼 곱게 늙는 이들을 보면 부럽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부러웠으나 이제는 나보다 나이 든 이들, 인생의 선배들 중에 아름답게 나이 든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그 이들을 닮고 싶다.
도봉문화원에 월요일이면 만나는 내 인생의 선배들, 닮고 싶은 선배들이 참 많다. 월요일이면 항상 맨 앞자리에 앉으셔서 경청하시는 K 원로 목사님, 평생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봉직하고 은퇴 후 문학을 공부한다고 오시는 L 전직 교수님, 그 외에도 전직을 다 알 수는 없으나 한때는 누군가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다가 순종하는 학생처럼 깍듯한 예를 다하는 이들, 이 분들은 남성들이다.
이뿐인가. 전직은 알 수 없으나 품행이 아주 다소곳한 처녀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의 여인들, 할머니라 부르면 섭섭해 하실 만큼 자기관리를 아주 잘하여 아름답게 나이 든 분들, 강의를 들으면서 마주치는 시선을 보면 마치 호기심 가득한 사춘기적 소녀들 같은 분들. 이 분들을 보면 나보다 저리 나이들 수 있을까 부럽다.
이런 어른들 중에 송파도서관에서 있었던 글쓰기 특강에서 만난 K 할머니, 아니 아주머니, 아니 누님, 어쨌든 우리 교실에서 가장 연장자인 분이시다. 그때 그 도서관에서의 인연으로, 그 강의가 끝나고 아쉽다며 도봉문화원에 오셨다. 그게 벌써 4년 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도봉문화원에 나오시는 걸 큰 즐거움으로 삼으신다. 여전히 소녀처럼 설레는 눈빛으로 강의를 들으신다. 가끔은 손수 볼펜으로 글을 서서 가져 오신다. 나는 첨삭을 해드린다. 깔끔한 옷차림이며, 말씀하시는 모습이며, 무엇하나 흐트러짐 없는 아주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롤 모델을 삼을 만하여, 보기만 해도 부럽고, 반갑다. 그런데도 어쩌다 한 번 첨삭을 해드리면 그게 미안하신지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 하신다. “선생님한테 제가 편지 썼어요. 이따 혼자 계실 때 읽어보세요.”라고 하시며 편지봉투를 슬그머니 주신다. 그렇게 받고 보면 사실은 감사하다는 진심어린 짧은 글과 함께 진심어린 마음이라며 받아달라는 금일봉이 담겨 있다. 이게 아닌데 싶은데, 그만큼 무엇 하나 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소곳하고 깔끔한 K선생님, 한때는 학교의 선생님이거나 대학교수가 되고 싶으셨다는 분을 보면 부럽다.
진정한 나의 선생님이시다. 이제 이 분을 선생님으로 삼으련다. 말로 무엇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 흐트러짐 없는 고운 차림, 누구를 대하든 흐트러짐 없는 모습, 나도 이분처럼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너도 나처럼 살아.”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 남에게 신세를 지고는 못 견디는 듯한 깍듯함, 진정한 내 삶의 스승님으로 마음에 모신다. 할 수만 있다면 닮고 싶다. 이분처럼 곱게, 깍듯하게, 다소곳하게 나이 들고 싶다. 소위 입은 닿고 지갑을 여는 후덕한 노년, 부럽지만 그리 하고 싶다.
한때는 젊은이들, 이를테면 지난날의 나로 돌아가 다시 살아보고 싶었으나 이제는 앞날을 바라보며 산다. 앞날의 이들이 부럽다. 나도 저분들처럼 곱고 아름답게 나이 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을이다. 집을 나서서 산을 올려다보면 올가을엔 그 어느 해보다 곱게 물드는 것 같다. 울긋불긋 각자 나름의 색깔을 가졌으되 잘 어울리는 나뭇잎들의 숲처럼, 나 역시 그 일부로 내 나름의 색을 곱게 덧칠하는 내 삶의 길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