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2- 작명가 아담의 후손인 나

영광도서 0 525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아담의 첫 직업은 두 가지이다. 야훼께서 그에게 동산을 관리하라 하셨고, 지은 바 된 피조물들을 데려다 그에게 세우니 그가 이름을 지었고 그대로 되었다니, 아담의 직업은 동산관리원이자 작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인류 최초의 직업이란 관리직과 작명가라고 할 수 있다. 최초에야 먹고 사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고도 충분했으니 소극적인 관리, 그저 단순노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반면 작명가로서는 할 일이 제법 많았을 것 같다. 추측컨대 아담은 작명하는 일로 일과를 빡빡하게 채우며 생활했을 것 같다. 하나의 이름을 지으면 또 다른 하나, 또 다른 하나, 줄줄이 이어졌을 테고, 하나의 이름을 지을 때마다 뿌듯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그렇게 이름 지어주는 재미로 한동안 세월 흐르는 줄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 얼추 그 일을 마무리했다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그만 하기로 했다 치자.

 

그 후엔 한동안 편안했으리라. 편안함이 한참 지나자 심심했을 터이다. 다시 이름 짓기를 시작하려니 재미적고 다른 무엇이 필요한데, 무엇이 필요한 줄 모르겠고, 그러면 심심하고 왠지 모를 우울함이 찾아 들었으리라. 그러자 새로운 인간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것이 여자이든 친구이든, 함께할 상대의 필요를 느꼈을 터이다. 뭔가를 하면 누군가에게 자랑을 해야 또 할 맛이 날 텐데, 그렇지 못하니 지루했을 테니까. 그래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주었다고 성경을 기록한다만 그런 것은 예외로 하자.

 

다만 작명을 말한다면, 작명은 소위 창의적인 일이다.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것에 이름 지어주기, 그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글을 쓸 때 고민하는 것이 제목인 이유다. 글을 쓰기 전에 제목을 서술적으로 짓는다면 이를 두괄식이라 한다면, 글을 쓰고 나서 제목을 끝에 붙인다면 미괄식 아닌가. 이런 식으로 작명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태초부터 글쓰기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써서, 아니 글의 구조를 말로 해서 정보를 전달했고, 계속 축적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글쓰기로 연결해 보자.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첫 구절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이다. 여기에 몸짓은 이름을 갖기 전의 모습이다. 꽃은 이름을 가진 모습이다. 이름을 갖기 전엔 의미 없음, 가치 없음, 관심 대상이 아님의 뜻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가치를 매겨주기, 관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이름 붙은 모든 것은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이는 글쓰기로 보면 주제이며 글의 가치이다. 때문에 작명한다는 것은 창조행위로서의 글쓰기이다.

 

이름을 지었다면 그 이름을 지은 이유를 세세히 설명한다. 세세히 설명하려면 그냥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불가능하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자세히 볼수록, 시간을 두고 볼수록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름 붙이기와 설명하기가 곧 글의 구성원리이다.

 

아름을 붙일 때는 쓰윽 보고 붙인다. 직감이다. 직감이 이름을 짓게 돕는다. 이름을 붙인 다음 직감을 확인한다. 이렇게 직감과 확인 과정을 거쳐 그 대상을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다음엔 다른 존재가 봐도 처음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덧붙인 것을 보면 수긍한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는 이어진다.

 

창작, 이는 조물주가 창조해낸 몸짓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작가는 작명가이다. 그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죽은 상태로 있는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게 살려낸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여 남에게 전달하기가 글이다. 글은 이처럼 이름에다 설명을 더한 것이다. 몸짓을 꽃으로 불러주고 그 꽃을 보여주기이다. 몸짓에 불과한 것에 의미와 가치를 주어 그 이름값을 하게 만든다. 때문에 세상에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은 그럴 만한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다. 세상 모두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반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에 맞는 값을 하면서 살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때문에 인간은 모두 이름값을 하고 살지는 못한다. 다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를테면 세상의 이름을 가진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것은 이름값대로 살지만 인간은 이름값을 하려 노력할 뿐이다.

 

다른 것의 이름을 붙여주고 스스로의 이름을 짓는 자인 인간, 인간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을 줄 알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무엇이든 이름을 가진 존재든 사물이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라. 그러면 그것이 창작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든가 묘사하라. 그것이 곧 글이다. 세상에 수많은 몸짓들은 너와 나를 기다린다. 설령 이름을 가진 것들도 새로운 이름을 기다린다. 그 몫은 너와 나의 몫이다. 그들 또는 그것들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름을 지어줄 때 그것은 나의 무엇이 되고, 의미가 된다.

 

이처럼 글쓰기란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연유든 사연이든 덧붙여줌으로써 읽는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풀어 기본적인 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풀어서 설명하거나 예를 들어 설명하면 곧 글이다. 설령 이름을 이미 지닌 것이 있다 한들, 그 이름만 있다면 이름의 뜻을 풀어주는 것, 또는 해석하는 것도 글이다. 이름을 가진 세상 모든 것들은 이름만 가졌지 설명은 세세하지 않으니, 그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글이다. 또는 이름과 함께 그럴 듯한 설명이나 전설이 있다 해도, 그것을 새롭게 이름을 부여하고 설명하는 것도 글이요, 그 전설을 해석하거나 재구성하는 것도 글이다.

 

나는 아담의 후손이다. 아담의 후손답게 무엇에 이름을 붙이고 나름대로 설명한다. 그리고는 나 스스로 만족한다. 아 이것도 글, 저것도 글, 세상 모든 게 글감이니, 쓸 게 많아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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