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12- 나는 나를 들여다본다

영광도서 0 568

창밖을 본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날씨가 추우면 눈으로 바뀔 때이지만 아직 눈으로 바뀔 만큼 기온이 낮지 않다. 내다보니 바깥 상황이 이렇다. 그렇다. 내다본다는 건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내다본다. 바깥 상황이 어떠한지 내다본다.

 

길을 가면서 본다. 길바닥을 내려다본다. 동전 하나 눈에 들어온다. 비록 작은 금액의 동전이지만 수입으로 잡는다. 먼 곳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걸었으면 못 보았을 동전 하나, 내려다본 덕분에 줍는다.

 

이처럼 보는 것도 여러 가지이다. 눈높이보다 낮은 걸 보면 내려다보다, 높은 걸 보면 올려다보다나 쳐다보다 또는 바라보다, 멀리를 보면 바라보다, 몰래 보면 엿보다, 어떤 은폐물이나 벽과 같은 무엇이 있는 곳에서 밖을 보면 내다보다, 반대로 이러한 어떤 상태를 중심으로 밖에서 안을 보면 들여다보다,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면 돌아보다, 뒤돌아보다, 어느 정도 일정 시간 동안 바라보면 지켜보다, 어느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보면 눈여겨보다, 수많은 것들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가려서 보는 가려보다 또는 골라보다, 이처럼 ‘보다’의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그만큼 세상의 모든 정보의 대부분은 눈으로 얻기 때문일 터다.

 

눈으로 우리는 세상을 본다. 그렇게 보는 아주 다양한 것들, 일들, 사건들, 오만 가지 일을 눈으로 얻는다. 수많은 본 것들에서 취사선택하여 기억한다. 무차별로 눈에 들어오는 숱한 것들 또는 일들, 그것들 중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남은 기억을 정보라 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억에 남은 모두는 유의미한 정보다. 이러한 유의미와 무의미는 내 마음대로 정하면 의식적인 활동이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남으면 무의식적인 활동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수시로 바깥의 일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이를 생산적으로 결정하려면 의식적으로 보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 이쯤에서 본다는 건 눈으로만 보는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보기는 마음이 결정함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은 단순하지만, 무엇을 보라고 명령하는 마음이 보다 중요하다. 무의식적인 마음의 명령과 의식적인 마음의 명령으로 ‘보다’는 바라보다, 올려다보다, 쳐다보다, 내려다보다, 엿보다, 내다보다 식으로 다양한 ‘보다’로 구별된다.

 

그렇다. 본다고 다 유의미한 정보가 아니라 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무의미와 유의미가 결정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내 의도와는 달리 유의미하다고 결정하여 기억에 남는 무의도적인 기억들도 있다. 이렇게 원하든 원치 않든 남을 기억들, 이 기억들을 기왕이면 내가 원하는 것들만 기억에 남기고 싶다면 의식을 늘 작동해야 한다.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고 볼 수 있도록 의식을 가지고 무엇이든 보려 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생각 없이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무의식적으로 본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반면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보면서 걸으면 의식적인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의식을 발동하면 무의식은 보는 행위에 관여하지 않는다. 생각하며 보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렇게 본 것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나는 보면서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쓸모는 있을까?

 

수없는 정보들, 그 정보들을 내 구미에 맞게 얻는 방법은 나에게 달려 있다. 이 방법이 바로 들여다보기이다. 앞에서 말한 보기의 여러 방법, 여러 방법으로 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들어올 때는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 들여다보기이다. 다름 아닌 내 안을 들여다보기이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는 건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각으로 보기이며, 생각의 방향에 따라 구별된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반성하다거나 후회하다, 유의미하게 남은 기억들을 보면 되새겨보다거나 성찰하다처럼 개념 없이 떠돌던 기억들은 나름의 개념으로 변하여 기억의 자리를 잡는다. 들여다보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끔 자신을 들여다보기, 그것이 반성이든 후회든, 또는 사색이든 성찰이든,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마음이 나를 결정한다. 나를 어떤 방향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나는 과거지향적인 존재일 수도, 미래지향적일 수도, 현실지향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들여다보기로 나의 가치관이 결정되고, 나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나를 만드는 건 경험이나 체험처럼 나에게 주어지는 또는 내가 행하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일 듯싶지만, 실상은 나의 들여다보기의 결과들이다. 쉽게 말하면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사느냐의 문제이다.

 

내다보는 것을 지배하는 것은 들여다보는 것이다. 들여다보기는 내다보는 걸 지배하기 때문에 의식적인 들여다보기로 내다보는 것을 결정함으로써 나는 의식적으로 필요한 것을 골라볼 수 있다.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모두를 보려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보려 한다. 하여 나는 나를 들여다본다. 나의 어제의 들여다보기가 지금의 나요,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기는 미래의 나를 결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본다. 나는 본다. 고로 나는 들여다본다. 나는 나를 들여다봄으로 의도적으로 나를 만들어간다. 나는 나다. 내가 만드는 나다. 그래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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