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117- 질문 있어요?
나는 말한다. 나는 강의를 한다. 어쩌면 잔소리를 한다. 잔소리를 하려고 강의를 한다. 나이 들면서 점차 질문을 잊는 대신 잔소리를 늘리며 산다. 다른 말로 할 말은 느는 대신 알고 싶은 것들은 줄어든다. 신체도 정신도 닮기 때문인지, 흔흔 말로 어려서는 힘이 다리에 있다면, 그 힘은 점차 위로 올라와서 젊어서는 허리하학적으로 말하고, 중년쯤 되면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고, 노인이 되면 힘이 입으로 나온다고나 할까. 때문에 나이 들수록 하고 싶은 말은 늘고 뭔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면서 잔소리만 는다.
어려서는 알고 싶은 게 많았다. 보는 것마다 신기했다. 알고 나면 신이 났다. 때문에 아이 적엔 질문을 많이 했다.
알고 싶은 마음은 호기심, 호기심을 굳이 감출 이유를 모른 아이는 질문을 한다. 질문을 하면 어른은 최대한 대답을 해주려 한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을 알아간다. 물론 어른 중엔 실제를, 진실을 대답한다. 어떤 어른은 귀찮으니까 대강 둘러 대답한다. 어떤 어른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어떤 어른은 질문을 못하게 한다. 아이는 이러 저러한 어른들 아래서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자란다. 여러 어른의 종류, 어떤 어른 아래서 아이가 자라느냐에 따라 아이는 은근히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어른은 아이를 낳기도 하지만 아이를 만들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만든다.
엉뚱한 대답으로 자란 아이, 질문을 막히면서 자란 아이는 점차 질문의 쓸모없을 만난다. 그러면서 아이는 질문을 잃는다. 질문 없는 아이들, 세상을 알아가는 일에 수동적으로 변한다. 질문이 없다 보니 수동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누구보다 쉽게 세뇌당하기도 한다. 질문 없는 세상이 삭막하고 문제를 많이 안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질문이 없기 때문에 삶의 중심이 없고, 한쪽으로 휘둘리면 그쪽으로만 향해 있어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한 번 빠지면 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그걸 모른다.
어른들의 꾸지람으로 막힌 질문의 문,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질문을 잊는다. 질문을 잊으니 당연히 질문하는 법을 잊는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 더는 능동적으로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주입식으로 지식을 늘린다. 주입식으로 받은 교육이 편하니까 질문하여 얻는 지식이 불편하다. 귀찮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보편은 좋고 특수는 불편하다. 전형이 자연스럽고 개성은 두렵다. 때문에 어른이 되면서 알려는 특이한 사람은 줄어들고 얻으려는 전형적인 사람만 늘어난다.
이제까지 이른 것을 정리하면 호기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앎을 낳는다. 호기심은 질문을 잉태하고, 잉태한 질문은 앎을 얻는다는 말이다. 앎의 잉태는 곧 호기심이다. 앎은 다시 질문을 낳는다. 새로운 앎이 또 다른 질문을 만나 궁금증을 잉태한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 질문을 하면 반드시 답은 나온다. 아이는 그 질문을 먹으면서 자란다. 어른이 되면서 어른들의 반응 때문에 질문을 잊는다. 질문을 잃은 어른들, 그 어른들이 나와 너 우리들이디.
그러면 어떻게 질문을 되찾을까? 우선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혼자 있을 때 질문을 던지되 자신에 관한 질문부터 세상에 대한 질문도 좋다. 아니 그보다 우선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부터 늘려야겠다. 나는 왜, 저들은 왜, 저것은 왜, 왜로 호기심을 만든다. 그렇게 내가 나에게 질문하고, 내 안에서 대답을 얻는다. 그러고도 남는 호기심, 그 호기심으로 남에게 묻는다. 동의를 구하기보다 나와는 다른 대답을 얻을 때 그것을 즐긴다. 그래야 질문하고 싶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은 오히려 질문을 막는다. 내가 원하는 답을 세상은 잘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나와는 다른 대답, 내가 원하지 않은 대답을 수용할 때 나는 또 다른 앎을 얻는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한다. 호기심이 필요한 이유,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아이는 배우지 않아도 질문한다. 어른은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질문한다. 때문에 아이는 질문을 배우지 않아도 좋다만 어른인 나는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나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내가 나에게 대답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자, 이런 존재들에 의해 지식은 수없이 분화하고 새로운 지식을 출산한다. 때문에 질문의 방법이나 질문의 질이 필요하다. 좋은 질문에 좋은 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출산하는 질문, 기왕이면 좋은 질문, 아무나 하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일까, 이렇게 묻는다면, 아무나일 수도 있다. 다만 조금만 질문법을 배우면 가능하다.
때문에 나는 타인에게 질문한다. 나와 다른 대답을 듣는다. 타인, 그는 너일 수도 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이일 수도 있고, 나보다 많은 지식을 가진 이일 수도 있다. 지위고하,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움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다양한 질문이 나에게 더 많은 앎을 준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때는 내가 궁금한 것, 내가 풀지 못한 것을 질문으로 푼다. 여럿 속에 있을 땐 나뿐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 할 질문을 타인에게 던진다. 질문은 나의 개성이자 곧 보편이다. 호기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지식을 낳는다, 지식은 지혜를 낳는다. 고로 질문은 지혜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강의를 마무리한다. 마무리하기 전에 용감하게 묻는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스럽지만 용감하게 묻는다.
“질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