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31- 행복과 불행에 관한 나의 생각

영광도서 0 455

“오늘도 행복하세요!”라고 인사한다. 듣기엔 좋은데 행복이 무엇인지 쉽게 심상이 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모리에 확 떠오르는 정경이 없다. 이처럼 어떤 뜻인지는 알겠으나 확 떠오르는 장면이 없는 명사들을 추상명사라고 한다. 반면 “빵 좀 사 와!”라는 부탁을 들으면 쉽게 그림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는 구체명사이다.

 

“오늘도 행복하세요!”에서 행복이란 말,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특별한 그림이 없다. 물론 문학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아주 기분 좋았던 어느 하루나 어느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날 같은 날을 만나란 인사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추상명사는 누구나 달리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그 말을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행복, 굳이 정의하라면 역으로 불행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좋은 기분이 비교적 길게 이어지는 상태 또는 상황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른 말로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상황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원하던 그 무엇을 드디어 얻은 기쁨의 상황을 행복하다 할 것이다. 기쁘다, 즐겁다, 좋다, 편안하다, 이런 형용사들은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니, 행복은 결국 내가 어떤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마음의 모습이다.

 

반면 우울하다, 기분 나쁘다, 운이 없다, 운 나쁘다, 외롭다, 쓸쓸하다, 이런 기분들이 일정 정도 이어지는 상황을 불행이라 할 만하다. 이런 상황들은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또는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이러한 기분이 드는 것이니, 불행 역시 마음의 모습으로 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행복에 비하면 조금은 객관적일 수는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기쁜, 또는 좋은 기분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기쁜 기분이나 좋은 기분은 순간적이라면 행복은 어느 정도 지속이 되는, 비교적 긴 시간의 좋은 기분을 뜻한다. 반면 불행은 운이 없다, 운이 나쁘다는 의미로 순간의 감정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행복은 불행이란 바탕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어쩌면 세상은 불행이란 커다란 배경포이고, 그 불행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라 할 수 있을 것이니, 불행이 없이는 만날 수 없는 감정이 행복이다.

 

불교의 경전 아함경에 행복과 불행에 관한 예화가 있으니, 이 경전에선 불행과 행복은 같은 부모를 둔 자매라 한다.

 

 

 

아침 일찍 초인종이 울린다. 주인이 누구인가 나가 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다. 여인이 "난 행복의 신이에요. 당신에게 행복을 주려고 찾아 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주인은 기쁨으로 여인을 안으로 맞아들인다.

 

그런데 잠시 후에 다시 초인종이 울린다. 주인이 밖으로 나간다. 이번에는 아주 못생긴 여인이 피고름까지 흘리며 서 있다. 그러자 주인이 "당장 꺼지지 못해 이런 미친년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시리..." 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자 그 여인은 "난 당신에게 불행을 주려고 온 불행의 신이에요. 조금 전에 당신이 맞아들인 행복의 신은 우리 언니예요. 우리는 늘 같이 다닌다오. 당신이 나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언니도 나와함께 떠나야 해요. 그러니 나를 맞아들이든지 언니를 내 보내든지 택일하세요."란다.

 

 

 

이 예화는 불행을 모른다면 행복 또한 알 수 없다는 뜻을 보여준다. 누구나 행복하기만을 원하나 불행을 겪어보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그렇지 않다면 불행한 일을 겪어보지 않았어도 불행한 모습들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면 행복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행복하기만을, 늘 좋은 일만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불행 없이는 우리는 행복을 가늠 할 수 없다. 나쁜 일 없이는 좋은 일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의 분명한 척도나 정확한 기준은 없다. 단지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착함과 악함을 비교를 통해서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거고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하다. 내가 누구를 나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 있는 것이어서 절대적인 기준보다는 우리의 눈높이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 눈높이만 조정하면 얼마든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우리가 뭔가를 사랑하며 그 일에 열정을 쏟으면 그 고통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일로 인해서 겪는 고통마저도 감미롭다.

 

이를테면 힘든 역주에 역주를 거듭하는 고통을 겪은 후에 골인하는 마라톤 선수가 순간의 지극히 짧은 환희로 그 고통이 언제인 듯 다 씻어지고 기쁨만 남듯이. 또는 먹고 싶은 것 다 못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못하고, 9개월을 참아내고 결국엔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겪고서 아기를 낳고 나면 그간의 고통들이 그 짧은 순간의 기쁨으로 다 상쇄되듯이 고통마저, 슬픔마저, 아픔마저 나를 단단하고 아름답게 단련시키는 삶의 요소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늘 행복할 수 있다.

 

나의 능력에 맞게, 나의 상황에 맞게 나의 눈높이를 조절할 줄 아는 슬기로움으로,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열정을 가진 삶으로, 고통 속에서도, 아픔 속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성숙하게 하는 교훈을 발견하는 생각 있는 삶을 가지므로 늘 성취감을 느끼면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 행복도 불행도 내 마음에 있으니 행복 역시 그럼에도 하는 양보의 감정에서 발산되는 일정 기간의 기분 좋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전체적 바탕 또는 배경포는 불행과 비극이다. 그러한 거대한 배경에 아니면 화선지에 우울의 무늬를 아로새길지, 아니면 기쁨의 무늬를 아로새길지는 나의 몫이다. 나는 오늘도 한 컷 한 컷 기쁨의 무늬를 아로새겨 넣으련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하루는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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