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38- 관찰, 성찰, 그리고 통찰

영광도서 0 484

시각은 인간이 가진 감각 중 가장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감각이다. 또한 감각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도록 돕는 감각이다. 세상의 수많은 정보는 눈을 통해 들어온다. 그만큼 눈은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우리가 얻는 정보 중 거의 90퍼센트 이상은 눈으로 얻는다. 그 다음이 귀로 얻는다. 때문에 우리가 가진 감각기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눈이다. 따라서 세상을 아는 모든 것의 척도를 눈을 기준으로 인간은 생각한다.

 

예를 들면 모든 것, 우리가 정신 또는 머리에 들여오는 모든 것, 감각의 모든 것을 보는 것으로 말한다. 귀로 들어서 아는 것도 들어본다, 혀로 아는 것도 맛을 본다, 코로 아는 것도 냄새를 맡아 본다, 피부로 아는 것도 대어 본다, 심지어 머리로 아는 것도 알아 본다고 표현한다. ‘보다’는 분명 시각과 관련한 감각임에도 모든 감각으로 아는 것 모두에 시각에 해당하는 ‘보다’를 으레 붙여서 한 단어처럼 쓴다. 엄연히 따지면 보조용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어로 인정하기도 한다.

 

보는 것과는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의 조어도 시각과 관련하여 쓰는 단어들이 무척 많다. 그 중에 관찰觀察은 ‘사물의 현상이나 동태 따위를 주의하여 잘 살펴봄’을 의미한다. 그냥 본다의 차원을 넘어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무심코 어떤 것이 눈에 들어와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나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그 무엇을 보는 것을 관찰이라고 한다. 물론 내 밖에 있는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성찰省察은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핌’을 의미한다. 관찰이 내 밖에 있는 대상을 내다보는 것이라면, 성찰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관찰과는 각도가 완전히 다르다. 관찰은 피상적인 대상을 보는 것임에 반해, 성찰의 대상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된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보다 의식을 가지고 무엇을 본다는 의미에서는 같으나, 관찰의 대상은 밖에 있고, 성찰의 대상은 정신적인 것으로 내 안에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관찰은 무엇을 내다보는 것이라면, 성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반성이나 후회로, 역시 보기이다. 이중 반성反省은 ‘자기 언행에 대해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봄’을 뜻한다. 내 안을 들여다보되 지난 일들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되새김하면서 들여다봄을 의미한다. 이 결과 능동적으로는 시행착오를 줄이거나 잘못을 인정하거나 용서를 빌거나 한다. 때문에 반성은 긍정적인 들여다봄이다. 반면 후회는 지난 일을 돌이켜봄이란 과정은 반성과 같으나 지난 일들 중 과오를 아프게 생각하여 능동적으로 보기보다 수동적으로 보아 과거에 머물러 벗어나지 못함을 뜻한다. 돌이켜보기는 하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들여다봄이 후회라 하겠다. 따라서 성찰이 이르는 곳은 후회와 반성을 넘어서 더욱 깊어진 상태로 자신을 들여다봄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관찰과 성찰의 방향은 자신의 안이냐 밖이냐, 곧 들여다보느냐 내다보느냐로 갈린다. 이와 더불어 관찰은 항상 현재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하여 성찰은 과거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미래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갈린다. 이렇게 관찰로 얻은 대상은 현자에겐 성찰의 대상으로 작용하고, 성찰의 결과로 생긴 자기 철학은 무엇을에 해당하는 관찰의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어떻게에 해당하는 대상을 보는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관찰과 성찰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내 삶을 지배한다.

 

보다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관찰과 성찰을 동시에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통찰洞察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은 곧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지만 꿰뚫어본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꼬챙이에 여러 가지를 꿰어놓고 한눈에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고려하여 성찰하는 것이 통찰이라 할 수 있으며, 이곳과 저곳을 동시에 고려하여 보는 것이 통찰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통찰은 편견을 극복하게 한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통찰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하나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동시에 아우르는 시각, 과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동시에 고려하는 넉넉함의 시각, 이처럼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의 리더들 자임하는 이들이 말로만 통찰이라 하지 않고 실제로 통찰의 자세로 사람들을, 세상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편견에 사로잡혀, 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 알고 싶은 것만 알아서 점점 더 네 편과 내편으로 가름하는 요즘, 우리 모두 세상을 자세히 보는 관찰에서 시작하여, 스스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을 넘어 이 모두를 아울러보는 통찰, 통찰의 여유를 찾아야 어두운 과거를 넘어 잡다한 현재를 마감하고 보다 밝고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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