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 부모님은 양미리 행상을 다니셨다

영광도서 0 476

지글지글 양미리가 화롯불에 익는 소리, 아니 물 흘러나오는 소리, 노릇노릇 익어가면서 마지막 물기를 뱉어내던 양미리 익어가는 소리, 지금도 구운 양미리를 좋아한다. 어렸을 적에 화롯볼에 구워먹던 맛은 안 나지만 여전히 숯불이나 연탄불 또는 가스레인지 불에 구워먹으면 맛이 그런 대로 괜찮다. 다 익기 전엔 지릭지릭 소리를 내며 물이 나오지만 노릇노릇하게 익을라치면 벌써 군침이 돈다. 지금은 식구 중에 양미리를 좋아하는 식구가 없어 거의 양미리 자체가 집에 없다만, 어쩌다 내 부탁에 마지못해 아내가 사 오면 조금은 꾸덕꾸덕하게 말린 것이 맛이 있다면서 베란다에 걸어둔다. 그런 중에 혼자 있을 때 한 마리 슬쩍 빼서 가스레인지 불에 구워 먹으면 먹을 만하다. 냄새를 얼른 지우는 게 쉽지 않지만.

 

내가 양미리를 좋아한 계기는 어렸을 적 영향인 것 같다. 몃 살쯤이었을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다니기 전이었던 것 같다. 엄마와 아버지는 겨울이면 5일 장 중 신남장이나 두촌장이 아닌 나머지 3일은 이집 저집 다니시면서 행상을 하셨다. 팔 물건은 단순했다. 양미리뿐이었다. 한 두름에 스무 마리인 지금과 달리 그때엔 양미리 한 두름에 마흔 마리였다. 5일장에서 엿을 팔아 그 돈으로 양미리를 사오시면 그 양미리 두름들을 방 천정에서 아래로 길게 내리 널었다. 마치 오징어 덕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방안 가득 양미리 두름들이 장식했다. 그러면 양미리들은 겨우 내내 그렇게 걸려 있기 일쑤였다. 꾸덕꾸덕 마른 양미리들을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에 담아 이고 아버지는 지게에 짊어지고 행상을 나가셨다. 행상을 나가신 엄마와 아버지는 일찍 돌아오시는 날이 거의 없으셨다. 우리 사는 동네가 아니라 먼 동네로 가신 탓에 물건을 다 파시고 오시려면 밤이 늦어야 돌아오셨다. 가실 때에도 짐을 잔뜩 짊어지셨고, 돌아오실 때에도 짐은 줄지 않았다. 양미리를 돈을 받고 파시는 게 아니라 옥수수나 콩 또는 팥으로 바꿔 오셨으니까.

 

밤이 오면 배가 고파서 잠도 못 자고 엄마 오시기만 기다렸다.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누가 선창을 했는지 모르지만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면.....” 그 노래를 부르면서 화롯불 가에 둘러앉아 추위를 녹이며 엄마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밤은 세상을 검은 장막으로 덮었다. 밤하늘엔 별이 아름다웠을 테지만 그땐 그 생각조차 않았다. 뭔가 먹을 것을 찾았다. 눈에 들어오는 먹잇감, 양미리였다. 팔 물건이라 먹어선 안 되었다. 때문에 한 두름에서 한 마리씩만 뽑았다. 물론 나는 방관자였을 뿐 그 작전에 원흉은 작은형이었다. 그렇게 두 마리를 뽑아 화롯불에 구웠다. 그리곤 입을 싹 닦았다. 그 맛이야 어디에 비하랴만.

 

그렇게 한 마리씩 빈 양미리 두름들은 다음날이면 또 외박을 나갔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고자질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도 공범이긴 했지만. 나중에라도 그 일을 말하지는 않았다. 고자질은 나쁜 것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세뇌되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 탓인지 지금도 여전히 고자질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썩 좋은 습관은 아니다만. 나 같은 놈만 있다면 내부 고발자는 없을 테니, 회사에 다니다 잘렸다고 사장 원망하는 사람들을 보면 ‘니 얼굴에 침 뱉기’라고, ‘그런 조직에 네가 그렇게 오래 있었다는 건 너를 깎아 내리는 일이야’라는 생각으로 다른 친구들에게 고언을 하는 나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나를 지배하는 건 아닐지.

 

그건 그렇고 양미리를 팔러 가서 팔았을 때 한 두름에 있어야 할 마릿수가 안 맞아서 부모님이 항의를 받지는 않으셨을지, 속였다는 말을 듣지는 않으셨을지, 그때는 철딱서니 없어 그 생각조차 못했다. 어쩌면 그 일로 수모를 겪으셨을지 모르겠다만, 한 번도 그걸 추궁하시지 않은 걸 보면 없어지려니 하고 여벌로 한 두름은 채워주는 용으로 활용하지 않으셨을까, 나중에 든 생각이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양미리에 손을 댔을까’ 그리 생각하셨을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알갛던 화로는 점차 재로 차고, 그 안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던 겨울밤의 양미리, 뜸북새를 불러내면서 이중창을 부르던 모습이. 노랫소리는 귓가에 들릴 듯한데, 심상은 뚜렷하게 텔레비전의 정겨운 화면, 정지화면처럼 생생한데 배고픈 기억은 심상에 없다. 시간은 고운 것만 남기고 아픈 것이나 괴로운 것은 지울 줄 아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리하여 아픔이나 괴로움은 모두 지우고 고운 기억만 남겨준다. 그걸 추억이라 부르겠지.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면.... 우리 엄마 엿 이고 장에 가시면 건빵 한 봉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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