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 아이스께끼 먹던 날의 기억

영광도서 0 507

인간은 참 간사하다. 상황에 따라 잘 변한다. 하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진화론의 요체가 적자생존이듯이,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다 변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적자생존, 인간인들 변하지 않으랴. 보다 세밀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몸 구석구석, 인간의 지체들 또한 잘 변한다.

 

예컨대 혀는 분명 나의 것인데 나의 혀는 얼마나 간사하게 변했던가. 짜디 짠 자반고등어가 그렇게 맛있더니, 지금은 줘도 못 먹겠더라. 그때는 무척 맛있었고 지금은 아주 맛이 없다. 내 혀는 변해도 아주 변했다. 참 간사한 놈이다. 혀만 그러랴. 눈맛도 그렇고, 코맛도 그렇고, 귀맛도 그렇다. 아주 고급스럽게 변했다.

 

그때는 아이스께끼가 무척 맛있었다. 지상에 그런 맛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들었을 정도니까. 시골에서 교회에 다니면 속회(구역예배)라고 금요일에 목회자가 가정방문을 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럴 때면 전도사를 비롯하여, 장로, 권사, 집사 등은 물론 일반 교인들도 함께 정한 집에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 주엔 다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은 그 집에서는 별식으로 방문한 이들을 대접했다. 어느 집에서 속회예배를 드렸는데, 이 집에서 주인이 내놓은 별식이 아이스께끼였단다. 감사기도를 장로가 했는데, 어찌나 오래하는지, 주인은 조마조마했단다. 그놈의 아이스께끼가 녹아날 것이 뻔했으니까. 이러해서 감사, 저러해서 감사, 한참만에야 감사기도는 끝나고 보니 당연히 아이스께끼는 본체는 거의 다 녹고 얼음물만 그릇에 고였더란다. 이를 본 장로 하는 말, 주님께서 먼저 아이스께끼를 맛있게 드셨네 했더란다. 그게 농이었는지, 아니면 믿음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만.

 

이런 이야기가 들 만큼 당시엔 아이스께끼를 먹어 보는 것이 꿈이었다. 어느 한 날 동생이 아버지를 따라 5일장에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5일장이 열리는 면소재지인 도관리에 가려면 6킬로미터는 족히 가야 했다. 그야말로 면소재지에서 깔딱고개와 다름없는 신작로를 걸어서 가족고개를 넘어 와야 우리 집이었다. 그러니 장에 한 번 다녀오려면 하루를 다 보내야 했다. 아버지 장에 가는 길에 따라간 동생이 아버지가 아이스께끼를 사주셔서 먹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너무 억울해서 아주 섧게 울었다. 그러자 엄마께서 아버지를 나무라셨다. 그걸 사주려면 똑같이 사줘야지 누군 사주고 누군 안 사주면 어떡하냐며. 다음 장날 장에 가시면 아이스께끼를 사다 주시겠다며 나를 달래셨다.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5일이 길게 갔다. 주 내내 가끔 아이스께끼 먹을 생각으로 장날을 기다렸다. 지금의 중국집 배달통 비슷하게 생긴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다니며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를 외치며 아이스크림을 팔던 모습을 본 것은 나중 일이었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장날, 엄마는 약속을 지키셨다. 장에 가신 길에 아이스께끼를 형재들 수만큼 사오셨다. 그런데 비닐에 여러 겹으로 쌌으니 멀쩡하겠거니 하고 보따리를 여셨을 때의 난감함, 아이스께끼는 나무젓가락처럼 생긴 대궁에 조금 붙어 있었고, 비닐엔 흥건하게 얼음물만 고였다. 엄마는 그것들과 얼음물을 몫을 지어 나누어주셨다. 비록 온전한 아이스께끼는 아니었지만 그 맛은 기막혔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그런 아이스께끼를 볼 수도 없다만, 누가 그걸 준다고 해도 안 먹는다. 보기만 해도 이만 시리고 맛도 그렇다. 그만큼 내 입도, 아니 내 혀도 간사스럽게 변한 거다. 혀만 변하나, 코도 변하고 귀도 변하고 눈도 변해서, 무엇을 보든 그때보다 눈이 높아도 한참은 높아서 웬만한 건 좋다고, 멋있다고 안 볼 테니. 그런 지체의 주인인 내가 안 변하려. 하긴 지체보다 먼저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그러니 인간 믿을 게 못되는 거다. 너무 믿으면 다친다.

 

물론 그때 같았으면 내가 식탐을 무척할 것 같은데, 지금은 거의 그렇지 않은 걸 봐도 나도 많이 변한 거다. 지금도 그때 그 풍경은 생생하다. 떼를 쓰며 울던 나, 신기한 듯 엄마의 장 보따리를 잔뜩 기대하며 빙 둘러앉아 보자기가 펼쳐지기를 기다리던 올망졸망한 형제들의 호기심 가득한 모습들이. 그때의 아이스께끼, 그립냐고? 글을 마무리하려면 그렇다고 마무리해야 그럴듯하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먹고 싶은 생각은커녕 지금은 그런 것 줘도 안 먹는다. 지금은 그보다 나은 아이스크림을 넘어 붕어싸만코 사먹을 능력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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