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9- 흑백사진처럼 남은 기억의 변 검사

영광도서 0 536

누구나 마음에 수채화든 유채화든 추억의 그림을 안고 산다. 추상화로 남은 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그림이라면, 구체화는 아니라도 얼추 스케치에 이르는 그림은 자신만의 기억이 잘 덧입혀진 그림이다. 때문에 ‘나때는 이랬어’ 하는 추상화보다는 ‘그때 나는 이랬어’하는 기억만이 보다 개성을 갖고 글감으로 자격을 갖춘다. 글은 보편적인 모습을 띄되 개인의 독특한 경험이 덧붙여진 것이어야 하니까. 이렇게 기억에 나는 그림은 대부분 즐거운 일들보다는 아픈 일들이 더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팠던 기억이 지금은 고운, 정겨운 추억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때는 해마다 한 번 학교에서 변 검사를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작은 비닐봉투를 나누어주셨다. 그러면 거기에 똥을 눈 다음, 성냥개피로 똥을 찍어 그 안에 넣고 봉하며 다음날 선생님의 교탁에 올려놓는 거였다. 물론 누구의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봉투마다 이름을 쓰게 되어 있었다. 때로는 집에서 똥을 싸서 담아오게 했으나 그게 잘 지켜지지 않으니까 선생님은 날을 잡아서 점심 먹은 후 학교 뒷산에 올라가 똥을 눈 다음 똥을 담아오게 했다. 그러다 보니 산에는 여기 저기 똥이 많았다. 때문에 점심 때면 남보다 빨리 올라가서 싸서 담는 게 좋았다. 어떤 녀석은 똥이 안 나오니까 남의 똥을 찾아 담기도 했고, 어떤 녀석은 개똥을 담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된 똥,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선생님은 한 아이 한 아이 이름을 불러 약을 나누어 주셨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약을 받았다. 어쩌다 특이한 약을 받는 아이는 한두 명, 나머지는 거의 회충약이었다. 변 검사는 누구하나 예외가 없었다.

 

학교에서 탄 약을 먹으면 다음날은 예외 없이 변에 하얗고 작은 벌레들이 변에 묻어나왔다. 그중에 끔찍했던 건 거시라는 놈이었다. 꼭 지렁이처럼 생긴 긴 놈이 뒤에서 매달렸다. 죽은 놈일 텐데 어느 정도 나오다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힘을 주어도 그 이상은 나오지 않으면 가는 나뭇가지를 두 개 잘라서 젓가락 모양으로 사용하여 놈을 집어 내렸다. 그제야 쭈욱 잡아내려졌다. 징그럽기도 하고 더럽기도 했지만 거시를 잡아서 몸 밖으로 싸 버리고 나면 왠지 뿌듯하고 기분도 좋았다.

 

이 모두가 아이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어떤 아이는 장난삼아 남의 똥을 담아가거나 개똥을 담아가는 장난을 쳤고, 어떤 아이는 어수룩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남겼지만, 나는 참 보편적인 아이라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누구나 기억할 변 검사와 변을 보고 나서의 뒤에 매달린 충을 끄집어내던 일들은 기억에 생생하다. 참 더럽고 징그러운, 기겁할 일이다만 지금은 더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징그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니라 매년 나오던 끔찍한 거시, 회충인가? 내 몸에 그런 놈이 살고 있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이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놈은 나오지 않는다. 내 몸에서 소멸했다는, 씨가 말랐다는 말일 텐데, 어쩌다 놈들은 적자생존에 실패한 걸까? 의학 상식이 없어 모르겠다. 어쩌면 그만큼 잘 먹고 위생적으로 변한 덕분일지는 모르겠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요즘 코로나19와 그림이 겹친다. 내 몸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내 몸엔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좋은 생명체들만 있어야 하는데 못된 것들이 내 몸에 들어와 있어 자칫하면 무섭게 내 몸을 망가뜨릴 수 있을 테니 무섭기도 하다. 우리 몸속에 거주할 수많은 기생충이며 수많은 균들, 네 몸에 이로움을 주는 면역 균들이며, 내 몸을 해치려는 병균들, 또는 면역세포들과 악성세포들이 내 안에서 지금도 생존경쟁을 벌일 생각을 하니, 내 몸이 경이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마치 살아 있는 지구, 내가 딛고 사는 이 대지도 내 몸과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나 역시 자연파괴자들인 인간이니 나는 면역 균이 아니라 병균이며, 가이아를 좀 먹는 기생충이 아닐까 싶다.

 

지렁이 같은 놈을 뒤에서 끄집어 내리던 날의 흑백사진 같은 기억, 약을 먹은 덕분에 놈이 내 안에 있었음을 알았던 순간, 약을 먹은 덕분에 놈을 몸 밖으로 내쫓았던 일, 하루빨리 코로나19를 내쫓을 만한 백신이 나왔으면 좋겠다. 또한 나 역시 세상에, 사회에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 병균이 아닌 삶을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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