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9- 다시 하고 싶은 내 연기의 한 장면

영광도서 0 530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님의 <가는 길>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그리움이라 부른다. 돌아갈 수 없으니 그립다 한다. 그냥 살면 지난 추억이나 기억은 산발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무질서하게 떠오를 테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 하니 순차적으로 한 장면 한 장면 뗘 오른다. 기록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기억을 잘 정리해주는, 차곡차곡 정리해주는 좋은 도구인 듯싶다. 기억 속을 헤집어 추억을 찾아내면 글을 쓰는 시간만이라도 마치 내가 그때 그곳에 돌아가 있는 듯 정겹고 좋다. 오늘도 그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딱히 시골에선 별 구경거리가 없었다. 그나마 크리스마스 저녁에 교회에서 벌이는 행사는 축제분위기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이라도 그날만큼은 하루 일을 마치고 교회에 모였다. 평소엔 감히 제단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그날은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서 강대상을 한쪽으로 미뤄놓고 강대상이 밀려난 제단은 무대로 쓰였다. 제단은 본 바닥보다 30여 센티미터 가량 높았고 좌우에 작은 기도실이 있어서 본바닥보다는 조금 좁은 구조였다. 그렇게 본바닥과 구분된 제단 끝을 중심으로 막을 설치하여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필요에 따라 막을 열고 닫도록 설치하면 무대 장치는 끝났다. 물론 제단 뒷벽엔 종이를 크게 한 자 한 자 오려 붙여 만든 <즐거운 성탄절>이란 문구가 아치형으로 달렸고, 그 밑에 평행으로 조금 작은 글씨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란 문구가 그럴 듯하게 장식을 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있었고,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무대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바뀔 때마다 막을 열고 닫는 역할을 청년들이 맡았다. 막은 양쪽에서 줄을 이용하여 잡아당기도록 되어 있었으나 때로 말을 잘 안 들으면 무대 안으로 들어가서 열거나 닫거나 바빴다. 막이 열리도 닫힐 때면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회자는 그 시간을 메우느라 옛날이야기를 한다거나 퀴즈를 내거나 하여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에 무대 뒤에서는 준비를 해야 했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떠오르지 않지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거의 아이들이 재롱 잔치하듯 노래를 부르거나 만담을 하거나 했는데, 어른이 출연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특히 흥기 아버지는 해마다 단골로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동네 어른들은 모두 초등학교를 간신히 나왔거나 아니면 학교에 다니지 못한 어른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흥기 아버지는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거기서 중학교 과정까지 마친 분이라 영어를 좀 했나 싶었다. 덕분에 그 아저씨는 행사 때 꼭 자청해서 나와서 캐럴을 불렀는데, 꼭 영어로 불렀다. “사일렌 나이트 홀리 인 나이트”거나 “징글벨” 두 곡 중 한 곡이었다.

 

나, 나는 연극에 단골로 출연했다. 대사를 잘 암기한 덕분에 나는 항상 대사가 긴 역을 맡았다. 연기를 잘하기는커녕 수줍어서 무대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터였지만 암기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꼭 역할을 맡긴 듯싶었다. 어느 한 해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감기로 연습에 못 나가자 크리스마스는 다가오지 내가 못 나가지, 하니 답답한 교사들이 집에까지 나를 데리러 와서 감기 걸린 나를 데려다 연습을 시켰다. 그 연극에서는 내가 출연하지 않으면 연습이 어려울 만큼 내가 해야 할 대사가 많은데다가 그걸 대신할 아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주일학교에 다니는 세 친구가 있었다. 여려서 손버릇이 좋지 않았던 아이, 착했던 아이, 용감했던 아이, 셋이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 날이었고, 서로 몰랐다가 그 사건으로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세 역할 중 착했던 아이, 나중에 목사가 된 아이 역을 맡은 것이다.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죄를 저지른 강도가 교회로 뛰어들었고, 이어서 신발을 신은 채로 강도를 잡으러 들어오는 형사를 목사인 내가 막아서는 장면이다. 그때 나의 역할은 강도를 일단 제단 뒤에 숨겨주고, 형사가 뛰어 들어오면 오른손을 쳐들어 형사를 막아선다. 그러면서 “잠깐 여기가 어딘지 당신은 아시오? 여기는 신성불가침의 종교적 영역이란 말이오!” 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그러면 형사는 머쓱하여 일단 행동을 멈춘다. 그러면 나는 그를 향해 “신을 벗으시오! 그리고 나가시오!”라고 톤을 좀 낮추면서 형사를 내 보내는 것으로 장면은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셋이서 극적으로 만나고 강도가 된 친구는 순순히 형사인 친구에게 체포당하여 퇴장하고 목사인 내가 마무리 꽤 긴 성경구절을 말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지금도 그 장면만큼은 그럴 듯하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사도 그 장면만큼은 줄줄 암기할 수 있으니까.

 

딱히 구경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골 마을, 밤중 가깝게 이어졌던 축제, 어설픈 아이들의 연극이며, 독창이거나 합창 또는 이중창, 삼중창,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장기를 자랑했고, 아일라이트인 연극으로 이어졌던 크리스마스 날 밤의 축제, 그것만이라도 어른들은 무척 즐거워하셨다. 밤늦도록 한 분도 가지 않고 끝까지 계셨다. 흥겨워하셨다.

 

어쩌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축제의 밤과도 같았던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날 저녁,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만, 기억에만 남은 그날의 정겨운 장면 장면들, 인정이 메말라가는 요즘, 코로나로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하는 요즘이라 더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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