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0- 아버지, 고독한 그 이름
그리스신화를 공부하다가 다시 성경을 읽는다. 서양문화의 두 기둥을 가리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 한다. 이중 헬레니즘의 텍스트라면 그리스신화요, 헤브라이즘의 텍스트는 성경이니까 둘에 모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세상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신화로 대별되는 헬레니즘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표방한다면, 성경으로 대별되는 헤브라이즘은 금욕을 표방한다. 인간중심의 인본사상과 신중심의 신본사상으로 팽팽하게 대칭을 이루면서 인간 생활을 균형 있게 잡아준다. 성서의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서로 잡아준다. 세상의 모든 원리가 대칭을 이루듯, 이 두 사상은 서로 상반된 것 같으나 서로의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 나 역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신화와 성경에 같은 관심을 갖는다. 때로는 신화에서 감탄을 하고 때로는 성경에서 감동을 받는다.
신화를 공부하면서 한동안 안 읽던 성경을 요즘 다시 읽는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절 저 구절에 의문을 두기도 하고, 재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읽다가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찡한 대목이 창세기 22장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귀중한 아들, 이삭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그를 부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명령하신다. 이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하고 출발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간다. 당연히 짐은 아들과 나누어 졌을 터이다. 삼 일째 되던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다. 그제야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아들에게 지우고, 그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제단을 쌓을 곳으로 간다. 그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대답한다.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에 이르러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는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한다. 제단 나무 위에 이삭을 올려놓는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한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급히 그를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한다. 사자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말한다.
번제란 불에 태워서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제물을 죽여서 피를 제단에 뿌린 후 제물을 바친다. 때문에 성경은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한 것으로 기록한 듯하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에서 나는 순종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이라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그다지 울림이 있거나 아프게 읽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번엔 이 성경 대목을 읽으면서 삼 일이라는 시간에 마음이 멈췄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농사수업을 받아야 한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져야 했다. 지게로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오기도 했고, 모를 져 나르기도 했고, 소 풀을 베어 짊어지고 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멀리 면소재지에 가서 비료를 타면 그걸 지고 오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면소재지까지는 산길로 8킬로미터 거리였다. 면소재지에서 까마득한 고개를 넘어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나는 한 포대에 25킬로그램짜리 두 포대, 50대 중반의 아버지는 세 포대를 짊어지셨다. 처음엔 제법 걸을 만했다. 고개를 오를수록 숨이 턱에 바쳤다.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참고 걸었다. 오르다 중간에 쉬면 다시 일어나 걷기가 너무 싫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힘들어 하면 뒤에 따라오시는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실까봐 내색 않고 고통을 참았다. 기어이 고개턱에 오르고 나서야 지게를 내려놓고 지게작대기로 바쳐놓고 쉬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아버지도 힘이 들으셨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 힘든 것만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는 나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셨으나 나보다 충분히 앞서 가실 만큼 힘이 장사셨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굳이 뒤에서 따라오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랬는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흘 길을 읽다가 문득 아버지와 함께 비료를 저 나르던 그날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의 마음도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때늦은 마음이 울컥 거렸다.
이삭이 걸어간다. 자신을 태울 장작을 짊어지고 아버지 아브라함 앞에서 걷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아버지가 짊어져야 할 짐이니 기꺼이 짊어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짐을 덜어준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이삭은 앞서 걸어간다. 뒤를 따른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뒤를 따른다. 사흘 길, 아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하루가 저물면 아들을 제물로 바칠 날 하루가 줄어든다. 저 죽을 줄 모르고 자기 제물을 짊어지고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앞서 걷는다. 또 하루가 간다. 이제 점점 거리는 줄어든다. 이삭을 바칠 시간은 달려든다. 이 날이 가면 끝이다. 마지막 날이 밝는다. 날은 밝으나 마음은 온통 흐리다 못해 깜깜하다. 두려움인지 망설임인지 마음은 갈등으로 오락가락한다. 아들은 여전히 저를 태울 장작을 지고 앞서 걷고 아버지는 뒤를 따른다. 말을 참고 기막힌 마음으로 그저 걷는다.
그렇게 사흘 길, 이삭의 뒤를 따라 걸었을 아브라함, 짊어진 짐의 무게보다 이삭을 제물 삼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아리고 쓰라렸을까! 뒤따라 걸으며, 아브라함은 겉으로는 태연해도 이삭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에 속울음을 채웠을 것이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사흘 길, 얼마나 길고 아린 시간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까?
제물로 바칠 아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아린 마음을 참았을 아브라함에 비교할 수는 없을지는 몰라도 일부러 뒤따라오시던 아버지, 지쳐서 휘청거리는 내 걸음을 뒤에서 바라보시며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아무 말씀은 안하셨어도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속울음을 삼켰으리란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쩌면 비료 두 포대를 짊어지고 휘청거리면서 앞서 걷는 나를 바라보는 내 아버지, 내 걸음을 바라보며 얼마나 아팠을까, 아버지께서 영원히 떠나신 지 30년이 지난 이제야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의 삼 일간의 행간을 읽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읽는다. 아버지의 그때 마음을 헤아린 지금 그냥 울고 싶다. 나이 탓인지, 나도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탓인지. 고독한 이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