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1- 풋옥수수와 감자 농사

영광도서 0 525

변화는 내부에서만 오로지 오지 않는다. 아무리 혼자 성찰하고 교요한 명상에 빠진다 해도 그 깨달음은 미미하다. 이에 병행하여 외부의 영향을 받아 성찰에 들어갈 때 진정한 깨달음은 온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변화는 고요한 가운데 혼자 성찰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외부의 자극을 받아 마음이 일렁일 때 변화는 온다. 한 사람의 변화의 과정의 그렇듯이 세상만사 모두 그런 것 같다. 역사도 그러한 작은 외부의 자극으로 대사건을 낳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농촌의 변화도 내부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어디서 어떻게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마을에 농사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노동력을 투자한 만큼 얻는 고전적인 농사 방식, 이를테면 옥수수를 심으면 가을까지 기다려 수확을 얻었던 것과 달리 풋옥수수로 판매하면서 가계에 돈이 돌기 시작했듯이, 마을 사람들이 돈맛을 알기 시작했다. 콩이나 팥의 경작은 줄고 옥수수농사, 즉 풋옥수수로 팔기 위한 옥수수 경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훨씬 다른 농사에 비해 유리했다.

 

옥수수농사는 워낙 잘 되는 곳이라 옥수수농사를 늘려가면서 집집마다 옥수수 밭이 늘었다. 그렇다고 풋옥수수 값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풋옥수수 판매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면서, 또한 중간에서 풋옥수수를 사는 장사꾼이 늘어나면서 가격은 조금씩 올라갔다. 생산자는 그대로 있었으나 그것을 중간에서 대량으로 사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장사꾼들, 지역 출신의 장사꾼도 생기면서 그들 간의 경쟁이 일어나면서 생산자인 우리는 판매하기에 유리했다.

 

한편으로는 옥수수농사보다 감자를 심을 수 있는 밭엔 감자를 많이 심었다. 감자도 장사꾼들이 대량으로 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감자가 질 되는 지역이라 옥수수 농사 못지않게, 오히려 나중엔 감자농사가 더 유리했다. 옥수수는 풋옥수수로 팔고도 밭을 완전히 비울 수 없었다. 골라 따고 나머지 수확을 위해 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에 비해 감자농사는 일정 기간이 지나 수확 철이 되면 한꺼번에 밭을 비울 수 있었다. 감자를 캘 때도 쉬운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소로 하여금 쟁기를 끌게 하여 감자 이랑을 훑어 나가게 한 다음 감자를 수학했다. 소로 밭 갈 듯이 하면 거의 감자들이 밖으로 몸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워 모으면 되었고 다 나오지 않는 감자는 호미로 마저 캐면 되었다. 그래서 수확도 쉬웠고 밭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은 감자농사, 이전처럼 집에서 먹거리로 짓는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여 차 때기로 팔아넘겼다. 감자 수확 철에는 감자 밭엔 빨간 마대자루가 여기 저지 밭을 장식하여 볼만 했다.

 

감자 농사를 끝내면 그 자리엔 메밀을 심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풋옥수수 농사에 이은 감자농사의 확대로 전에 비해 훨씬 생활은 피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형도 서울로 갔지만 엄마, 아버지, 나는 노동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우리 농사뿐 아니라 다른 집에서 손이 부족할 때 풋옥수수 작업을 한다거나 감자 캐는 일을 한다거나 하여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수년 후에는 우리도 우리 집을 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난 그때, 남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생활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적어도 나물죽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은 없었다. 전적으로 쌀밥을 먹지는 못해도 가끔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벼농사는 적어도 팔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내에서 식량으로 농사를 지었으니까. 전에 보다 훨씬 생활이 피기 했지만 그 변화를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다. 서서히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젖어드는 것처럼 변화가 시작되었으니까.

 

돌아보면 그때부터 남의 빚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농사를 풋옥수수와 감자를 심으면서, 남의 집 품을 팔면서 빚을 갚아 나가기 시작했고, 외상 비료와 외상 농약을 받기 위한 수모도 서서히 잊힌 것 같다. 우리가 시작한 건 아닌데 누군가 시작한 풋옥수수 팔이, 감자 대량 생산, 외부에서 온 자극이 이끈 변화, 알게 모르게 가져온 변화로 생활이 나아졌듯이 지금도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을 터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탈진 밭에 여기 저기 놓인 감자를 가득 담은 빨간 마대자루들, 트럭에 가득 실려 돈을 안기고 떠난 감자자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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