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5- 치명적인 상처를 입던 날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그만큼 우리 인간 삶은 늘 위험을 내포한다. 멀쩡한 하늘에 날벼락이 때릴 때가 있는 것처럼 안전지대라 여겼던 인도 위로 어떤 미친 자가 차를 몰고 올라올 수도 있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어떤 시간도 안전한 시간은 없다. 안전한 곳에 안전한 시간에 있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심장을 부여안고 쓰러질 수도 있으니, 인간의 삶은 참 허약하다. 물론 때로는 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물론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은 질길 땐 아주 질긴 것이긴 하지만.
농사짓는 일도 그렇다 피상적으로 농촌은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던가, 도시와 달리 모든 삶이 느긋하고 여유롭고, 변화도 거의 없어서 위험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매사 하나 하나가 위험을 내포한 일들이다. 맨손으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쟁기를 가지고 해야 하니, 쟁기로 인해 생길 사건 사고가 왜 없겠는가. 스스로 쟁기를 이용하다 위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일하다 보면 벌떼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어느 밭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독을 머금고 손을 물어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킬 뱀의 습격도 가늠할 수 없으니, 농삿일도 도시의 삶 못지않게 위험하다.
봄에 파종기를 제외하면 주로 낫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풀베기라든가 벼나 곡식 베기라든가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낫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우리 동네에 정이장이 논두렁을 깎다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일을 당했다. 장화를 신고 논두렁을 깎고 있었는데 풀을 낫으로 후리다가 그만 뱀의 머리를 풀과 함께 후린 거였다. 그 뱀 대가리가 하필 펄쩍 뛰면서 장화 속으로 들어간 거였다. 뱀 대가리가 서늘하게 장화 속에서 펄떡 거리자 급한 나머지 장화를 벗으려 했으나 급할수록 잘 벗기지 않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단다. 물론 논두렁에 있던 그 뱀은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은 꽃뱀이었으니 다행이긴 했다. 김을 매거나 풀을 베거나 할 때 독사나 살모사를 만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농삿일은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낫이나 도끼를 사용하여 땔감을 마련해야 했으니, 오른손잡이에겐 주로 왼손이나 왼발이 위험했다. 오른손으로 낫을 들고 왼손으로 대상을 잡은 경우가 많아서 낫 튀어 오르기라도 하면 왼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일쑤였다. 하여 내 손엔 그때 입었던 상처들이 아직 선명하게 여러 군데 남아 있다.
한 번은 무척 위험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겨울 땔감 마련, 즉 농목 품앗이를 할 때였다. 혼자서 나무를 하려면 지루하고 치열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십여 명 가량 조를 짜서 품앗이를 했다. 한 집에 십여 명이 가서 나무를 하면 한 사람당 하루에 열 짐 내지 열두어 짐을 하면 하루 백여 짐은 넉넉히 할 수 있었다. 팔십 짐이나 백 짐이면 보통 농목 한 가리를 세울 수 있었다. 세 단 한 짐인데 백 짐이면 삼백 단이니, 그렇게 하루에 모아서 저녁이면 한 가리를 만들 수 있었다. 해서 우리는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매일 농목을 했다.
그런 어느 겨울 날, 고모사촌 댁 나무를 하러 갔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조카와 품앗이를 할 때였다. 오전 한나절은 무사히 나무를 했으니 한 사람 당 다섯 짐은 했고 한 짐 더하면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추운 날이었는데 나무가 얼어서 낫이 퉁퉁 튀어 오르곤 했다. 소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를 해 놓고 내려와서 그 가지들을 착착 조겨서 단을 만들어 묶을 참이었다. 제법 굵은 나뭇가지를 자르기 위해 낫으로 힘차게 나무를 내리쳤다고 생각했는데, 낫이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낫날이 나무에 닿지 않고 내 왼쪽 무릎 아래를 가격했다. 순간 옷이 학 잘려나갔고 잘려나간 옷 사이로 뼈가 훤히 드러났다.
놀란 나는 지혈하기 위해 일단 찍힌 곳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옆에서 나무를 하던 친구에게 “나 발 찍었어!”라고 말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친구는 장난하는 줄 알고 반응이 없었다. 좀 더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하던 조카가 우연히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달려왔다. 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단다. 내 이마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다른 생각은 일체 안 나고 물이 갑자기 그리웠다. 나는 ‘물물’이라고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조카가 자신이 입고 있던 런닝셔츠를 북 찢었다. 찢은 런닝으로 내개 잡고 있던 상처를 싸맸다. 그리곤 나를 업고 달렸다.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옆집 아줌마가 달려왔다. 말려두었던 쑥을 가져온 아주머니는 쑥에 불을 붙여 내 상처를 지졌다. 한참을 반복해서 쑥불로 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마쳤다. 그렇다고 물론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병원이란 이름조차 우리 머릿속엔 없었다. 병원에 가려면 걸어서 8킬로미터, 거기서 버스를 타고 20킬로미터 읍에 가야 했으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병원에 갈 생각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날부터 두어 달은 거의 돌아다니지 못하고 일도 못하고 집에서 마당가에 나오는 정도로 지내야 했다. 한동안은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시간을 꽤 지나고서야 그 상처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무감각한 상처로 남았지만 그때 당한 상처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제법 입이 큰 사람 입술만한 크기의 상처, 돌아보면 자칫 잘못하면, 조치를 제대로 못했으면 꽤 깊은 산속에서 그대로 치명적인 위험을 당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어디인들 안전지대, 언제인들 안전한 시간은 없다는 것을 요즘도 새삼 느낀다. 용케도 이제껏 살아온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랴 싶다. 여전한 삶의 현장,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나훈아의 노래 가사처럼 “그저 와준 오늘‘을 고맙게 여기며 죽어도 오고 마는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