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9-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영광도서 0 475

가끔 비 내리는 날, 카페에 창가에 앉으면 수채화처럼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어렸을 적 학교 가는 풍경이다. 비 오는 날이면 하늘가로 펄럭이던 하얀 비닐의 물결이 등교풍경을 열어주고 이어서 기억은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등장시켜준다. 서글픔이라기보다 낭만적인 풍경, 아니 동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는 실제로 그랬다. 그것이 서글프다거나 고생스럽다거나 그렇지 않았다.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책보대신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라기보다 특이했고,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를 봐도 부럽지 않았다. 그냥 신기했다. 비 오는 날이면 맨발로 다니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

 

집에서 학교 까지는 6킬로미터 쯤 되었다. 때문에 한달음에 갈 수 없었다. 신작로라고 잘 정비된 길도 아니었다. 항상 트럭의 양쪽 바퀴가 구르는 곳은 가운데보다 낮게 골이 파였고, 모래가 아닌 구역엔 가운데엔 풀이 자라고 바퀴 구르는 자리는 풀이 없는 이를테면 오솔길 두 개가 평행을 이루는 길을 닮았다. 그냥 가기엔 지루했다. 해서 나도 그렇거니와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굴렁쇠를 굴리며 신작로를 달렸다. 가끔 그땐 그게 굴렁쇠라는 것도 사실은 몰랐다. 와라고 불렀다. 조금은 굵은 철사를 둥근 원으로 굽게 만들었다. 굴림 쇠는 조금 가는 철사를 디귿 자 모양으로 만든 철사를 나무자루에 박아서 사용했다. 비교적 평평한 길에선 여유 있게 굴리며 걸을 수 있었으나, 경사진 내리막에선 너무 빨리 구르기 때문에 굴림대의 디귿자 부분을 안에 넣어서 빨리 구르지 못하게 브레이크를 잡듯 굴렸고, 오르막을 굴러 올리려면 평지에서 미리 속도를 내기 시작해서 가속도를 붙이며 굴러 올려야 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외솔백이 언덕이나 물굽이 언덕은 고학년 아이들이 아니면 끝까지 안 멈추고 굴려 올리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면 힘은 들지만 일단 재미도 있거니와 학교까지 훨씬 빨리 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갈래진 나뭇가지, 양 갈래로 30센티미터는 족히 넘게 간격이 있는 와이자형에 자루가 1미터 가량이거나 넘는 나무를 구했다. 마치 두 발 쇠스랑 모양의 나뭇가지 같았다. 갈래진 바로 위에 책보를 질끈 매달았다. 그리곤 그것을 끌고 달렸다. 내리막이든 오르막이든 속도조절이 쉬웠다. 1학년 아이들은 그래도 잘 못 끌기 때문에 선배아이들이 책보를 받아 두세 개씩 매달고 달리다 걷다 반복하며 걸었다. 그냥 가기에 심심하니까 아이들은 마치 트럭이 달리듯이 입으로는 부우웅 소리를 내면서 가끔은 달렸다. 그럴 때면 조금 가문 때엔 먼지가 뽀얗게 일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트럭이 오는 듯 먼지가 피어올랐다.

 

학교 운동장 까지는 그걸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굴렁쇠도 그렇거니와 나뭇가지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해서 나름 모두들 그것을 감추어 두는 곳이 있었다. 각각이 표시가 났기 때문에 어디에 감춘들 남의 것은 가져가는 적은 없었다. 나름대로 아이들의 법이 작동했고 그걸 어기면 그는 완전히 왕따를 당하니까 잘 지켜졌다.

 

비가 오는 날엔 그럴 수 없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이라곤 선생님 아들하고 괘석리 이장 아들 빼고는 없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못자리용 비닐을 네모지게 잘라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펄럭이며 갔다. 약간의 바람이 불면 마치 작은 비닐 지붕처럼 평행을 이루며 위아래로 흔들리며 비를 막아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료포대의 두 면만 쪼개어 고깔 모양으로 쓰고 다녔다. 그러면 머리와 등은 비를 안 맞을 정도는 되었다. 때문에 비 오는 날 길에는 하얀 비닐들이 아이들의 머리 위로 물결치듯 펄럭였다.

 

돌아오는 길엔 시간이 그리 급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철따라 나름 먹거리를 구해 먹으며 돌아왔다. 찔레를 꺾어 먹거나 시금을 뜯어 먹거나 억새 이삭이 나오기 전 삐비라고 부르면 그것을 뽑아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때가 많았다. 가끔은 남의 옥수수 밭에 들어가 옥수수 대궁을 잘라 빨아 먹다가 들켜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노작거리며 돌아올 수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돕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여러 심부름을 하거나 토끼풀을 뜯기, 소꼴 베기를 해야 했으므로 편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일단 무엇에 빠지면 나중 일은 나중이었다. 그야 말로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게 전부였다. 때문에 그때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항상 잘하고 못하는 아이는 항상 못하는, 타고난 대로 하는 시절이었다.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살아오는 과정엔 소규모 부족으로 살 땐 모든 것을 공유하는 때가 있었다 한다. 그때가 인간이 사회적동물이라고 할 때 가장 평화로웠던 시대, 그야말로 현대에 이르러 돌아보면 유토피아와 같은 시대였던 때가 있었더란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도 그러했던 것 같다. 적어도 소위 잘 사는 아이들은 거의 드물었던 시대, 모두가 그저 고만고만하게 살았으므로, 삶의 양식들이 비슷했으므로 부러움의 대상이 없었으니 그랬던 듯싶다. 부럽다, 행복하다, 시샘한다, 그 모두는 상대적인지라 대부분 고만고만하게 살면 삶은 이런 거려니 하고 산다. 때문에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없어서 자족하며 살았던 시대, 지금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려면 극구 돌아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어쩌면 시위라도 벌일지 모르지만 추억하는 시간 동안은 그때가 그립다. 비 오는 날의 흰 비닐이 하늘로 펄럭거리면서 흰 물결을 이루는 풍경, 마치 아름다운 동화 속 수채화 같다. 저절로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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