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9- 엄마가 들은 아버지의 슬픈 역사

영광도서 0 571

simple, 심플하다는 뜻은 다분히 단순하다는 뜻만 있지 않다. 순수하다는 의미와 착하다 또는 바보스럽다는 뜻도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얼핏 보면 서로 관계없는 뜻인 것 같으나 좀 더 생각하면 서로 의미가 통함을 알 수 있다. 바보는 단순하다, 또한 순수하다고도 할 수 있고, 착하다, 바보스럽다는 의미와 통한다.

 

나의 아버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simple이다. 천성인지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버지를 만난 이후 내가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든 싫은 소리는 전혀 못하셨다. 엄마에게도, 자식들인 우리들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상스러운 말을 하시는 것을 못 보았다. 엄마와도 누군가와도 싸우시는 것 못 보았다. 그러니 누구에게든 호인이셨다.

 

그렇다고 아주 과묵하신 것도 아니었다. 동네 어른들을 대하시는 걸 보면 농담을 아주 잘하셨다. 누군가 말하면 그 말꼬리를 받아서 그럴 듯한 우스갯소리를 만드셔서 사람들을 웃게 하시는 말재주도 있으셨다. 물론 집에서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남한테 시키느니 당신이 무엇이든 하셨으니 잔소리란 것을 모르셨다. 동네 사람들 대하는 것과 가족을 대하는 모습은 아주 다르셨다.

 

이 정도가 내가 아버지를 만난 이후의 총평이라면 총평이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의 아버지, 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지, 물론 어떤 생각으로 사시는지는 전혀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나를 이 땅에 있게 하신 아버지의 역사라면 역사, 아버지의 사연이라면 사연,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들은 적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아버지의 역사, 그건 엄마께서 전해주신 덕분에 어쩌면 내가 닮았을 아버지의 슬픈 사연을 그나마 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의 할아버지께는 아들이 셋 있었다. 그런데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는 나의 할머니와 내 아버지 형제들을 버려두고 만주로 떠나셨다. 그때가 큰아버지는 열 살, 나의 아버지는 일곱 살, 작은아버지는 네 살이었다.

 

만주에 다녀오겠다며 떠나신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돌아오지 않으시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찾아가신다면서, 내 큰아버지는 남의 집에 머슴으로 주시고, 나의 아버지는 종씨 집안의 양자로 주시고, 나의 작은아버지만 품에 안고 만주로 떠나신 후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것, 여기까지가 아버지에 관한 역하라면 역사였다.

 

그 다음을 아버지의 사연이라면, 일곱 살에 양부모 밑에서 자란 아버지, 나에게는 양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재산은 꽤 많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을 얻지 못하셨다. 하여 할머니를 그대로 두고, 다른 할머니를 들이셔서 할머니 두 분이 한 집에 사셨다. 그럼에도 사이가 좋으셨던 건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는 장님이셨는데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우셨다고 엄마는 내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내가 이집 귀신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그 소경 할머니 덕분이었단다.”라고 하셨을 만큼.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아들을 얻지 못하셨고, 종씨는 아니지만 수양딸을 들였으니 나의 고모였다. 그 다음에 나의 아버지는 친척의 아들인지라 양자로 들여 호적에 올리셨다고 했다. 스물한 살 때 아버지는 열네 살의 엄마를 만나 결혼하셨다. 여기까지가 엄마가 들은 아버지의 역사였다.

 

이후부터는 엄마가 직접 겪고 본 아버지의 모습일 터이다. 엄마의 증언을 들어보면 아버지는 그다지 어린 시절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듯싶지만 나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지, 무엇을 하며 그 시절을 보내셨을지 알지 못한다. 엄마 역시 아버지가 어쩌다 해주신 말들을 내게 전했을 테니, 나는 나의 뿌리의 내밀한 사연을, 진정한 아버지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때로는 ‘나 때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때로는 꼰대식으로 말씀을 하셨을 법하지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지식들에게 말씀을 잘하지 않으셨다. 밖에서와는 전혀 다르셨다. 엄마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역사도 추측컨대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었으리라. 엄마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하든,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단순 그 자체였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품고 살터인데, 당신의 말을 가득 안고만 사셨던 아버지, 은연중에 나 자신도 그런 아버지를 닮았음을 안다. 내 속내를 딸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말하지 못한다. 물론 딸들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때로는 단순하고 바보스러운 나, 나도 모르게 멍청한 나, 그렇지. 그건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나를 위로하면서도 양부모 밑에서 자란 아버지의 슬픔이 전이 되어 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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