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9- 왜 때려 왜 때려 우리 시목게!

영광도서 0 538

그래,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죽을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을 오늘 아침엔 되새긴다. 무심코 장난삼아 한 말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지 들추어 본다. 제법 있다. 때로는 지나가는 말로 던진 말이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때로는 무심코 남들 따라 누군가를 놀려대면서 아린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게다 싶다. 이제와 반성한들 소용없긴 하다만. 어리다는 이유로 모두 용서되는 것도 아니다만.

 

집에서 출발해서 학교까지 가려면 족히 십리 길을 걸어야 했다. 그 중간쯤, 외솔배기 언덕을 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다 조금 급한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 지점인 물굽이에 신작로에 면한 가게집이 하나 있고, 이어서 바로 옆에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러니까 신작로를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급경사진 밭이 있고 밭 아래로 백우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흘렀고, 신작로 우측엔 신작로에 거의 붙다시피 한 그 두 집이 있고, 두 집 뒤로는 경사 급한 산이 이어졌다.

 

가게집에선 노트며 연필, 칼 등의 학용품이며, 손오공과 같은 라면땅, 쫀드기며 건빵, 크라운산도와 같은 과자류를 파는 것은 물론, 알파칸, 용감한 형제 등의 만화책을 팔거나 빌려주었다. 문제는 가게집 옆집이었다.

 

이 집에는 지금 생각하면 돌팔이 의사 심씨네가 살았다. 이 집에 인상적인 일이 셋 있었다. 하나는 작고 발이 재빠른, 노란색 개를 기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때야 개는 모도 놓아길렀으니 이놈은 아주 위협적이었다. 학교에 가거나 돌아오려면 이 집 마당인 신작로를 지나지 않고는 통행이 불가능했는데, 놈이 재빨리 달려와서 뒷 가랑이를 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놈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기 위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면서 걷거나 아니면 천천히 가다가 그곳에 이르면 재빨리 휙 달려 지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나든 저렇게 지나든 놈은 용케도 알고 신작로와 면한 마루 밑에서 달려 나와 달려들곤 했다. 그러면 작은 우리들은 목숨을 걸듯이 뒤꽁무니를 빼야 했다. 때문에 이 집을 지나가는 일은 늘 걱정이었다.

 

심씨 아저씨는 우리 동네에선 유명한 의사였다. 치아가 아파도 배가 아파도 어디가 아파도 민간요접이 안 통하면 심 아저씨를 불렀다. 우리 집에도 여러 번 오셨다. 치아를 때로는 펜치처럼 생긴 것으로 뽑아주기도 했고,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심하게 아픈 병도 어디서 구했나 몰라도 이런 저런 약으로 치료해주었을 뿐 아니라 옥도정기라든가 상처에 바르는 액도 가지고 다니며 어떤 병이든 치료해줄 만큼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돈을 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런 저런 곡류나 약초라든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성의껏 드리면 그걸로 족할 만큼, 그럼에도 기꺼이 달려오셔서 환자들을 치료하곤 하는 아주 선한 분이셨다. 다만 그 집에 오래 살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신 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에겐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았으나, 이 분에겐 이상스러운 소문이 떠돌았다. 아줌마한테 맞고 산다는 소문이었다. 아저씨네 아들이 우리 반이었다. 그 위에 우리보다 3년 위의 누나가 있었다. 덩치가 제법 컸다. 아저씨는 덩치가 작달막했으나 단단해 보였다. 반면 아줌마는 키가 훤칠하고 다부진 모습이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아저씨는 아줌마한테 가끔 매를 맞았고, 아줌마는 태권도를 배웠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른들의 말이 떠돌았던 탓인지, 아이들 역시 그 소문을 믿었다. 하여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혼자일 때는 감히 못하다가 여럿이 지날 때면 아이들은 주문을 외우듯, 또는 노래를 부르듯 “왜 때려 왜 때려 우리 시목게 왜 때려!”라고 외치곤 냅다 달아났다. 도망치면서 뒤돌아보면 창호지 문을 연 아줌마가 노한 눈빛으로 우리를 따라잡을 기세였다. 무사히 도망치긴 했으나 집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그 집 앞을 지나려면 두 가지 공포, 혹시 아줌마가 기억하고 있다가 지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 작고 주황색 사나운 개가 달려들지 않을까 겁이 나서 검정고무신을 벗어들고 숨을 죽이며 그 집을 지나야 했다.

 

분명 심씨 아저씨는 참 고마운 분이었다. 동네에서는 무척 아저씨를 믿고 따랐다. 실제로 아줌마한테 맞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별명까지 얻었던 아저씨, 어떤 얼굴 표정으로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엔 인자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교 가는 길이면 놀려대는 철부지, 배은망덕한 말 때문인지 오래 지내지 않고 두서너 해나 지났을까, 내가 3학년 때 이사를 가고 말았다.

 

병원도 없는 산골 마을에선 절대적으로 아주 고마웠던 아저씨, 철없이 지껄인 우리들의 언어폭력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우리 반 아이도 상처를 입었을 터이고, 아저씨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고마운 아저씨가 이사를 간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잊고 있던 어린 날의 일들, 들추면 들출수록 참 못된 짓 많이 한 것 같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리지어 외쳐대던, 재미삼아 외쳐대던 “왜 때려 왜 때려 우리 시목게 왜 때려!” 참 무서운 언어폭력이었다는 걸, 우리 반 아이였던 그 애에게 더더욱 끔찍한 폭력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이젠 어디선가 함께 나이 들어갈 테지만 정신도 몸도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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