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2- 뻥튀기 아저씨가 동네에 오면

영광도서 0 601

지금이야 어디에 가든 과자가 많다. 웬만한 정도라면 과자는 사 먹고 살만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건빵이니 라면땅이니 이 정도를 못 먹을 사정의 아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과자 종류도 많고 어디서든 구할 수도 있는 시대이다.

 

나 어렸을 적엔 먹거리가 별로 없었다. 구멍가게에나 가야 먹거리를 살 수 있었는데, 구멍가게도 집에서 2킬로미터는 가야 한 곳이 있었고, 학교 근처에 가야 세 곳 있었다. 구멍가게에 가면 먹고 싶은 크라운산도라든가 손오공이란 라면땅이라든가 달콤한 스위프트빵이라든가 아삭아삭하게 바스러지면서 달콤한 건빵이라든가 입맛을 다시게 하고 군침 흘리게 하는 과자류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그걸 대신에 겨울이면 그래도 군것질 삼아 실컷 먹을 수 있은 것이라면 강냉이 뻥튀기가 있었다. 뻥을 튀기려면 면소재지가 있는 오일장에나 가야 했기 때문에 그것도 자주 먹을 수는 없었다. 과자가 귀했던 시절, 강냉이 뻥은 정말 맛이 있었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그걸 튀겨오면 감추어 두고 일정 양만 나누어주곤 하셨다. 그것도 한 곳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그것을 나름 아껴 먹어야 했다. 먼저 먹어치우면 나중에 형이나 동생이 먹을 때 먹고 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끝까지 제일 아꼈다가 나중에까지 먹곤 했다.

 

다행히도 겨울이면 도관리 영가터에 사는 뻥쟁이 아저씨가 들어오곤 했다. 내 또래의 그 분 아들이 함께 따라오곤 했는데, 아이는 아저씨를 도와서 한통에 들어갈 옥수수를 챙겨 담거나 뻥이 터질 때 튀어나가지 않도록 뻥틀에 씌우는 망을 잡아주곤 했다. 잘게 쪼갠 장작으로 불을 피우면서 통을 달궈야 해서인지 아저씨도 아이도 얼굴이 유난히 검었다. 물론 숯이 묻어서 그런 점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검게 그을린 머리를 덮고 귀를 푹 덮는 모자를 썼는데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불을 피우며 뻥을 튀긴다 해도 겨울이니 추위에 견디려면 그런 모자를 써야 할 터였다.

 

아저씨는 지게에다 뻥 틀에다 뻥 받이 자루를 지고 고개를 넘어오셨다. 바로 우리 앞집에 허씨네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 옆 마당이 넓었으므로 그 집 마당을 빌려 자리를 잡았다. 대신 그 집에서 튀길 뻥은 무료로 튀겨주었고, 그 집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제공 받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겨우내 먹을 옥수수 뻥을 튀겼다. 한 통에 옥수수 뒤 되박이 들어갔는데, 한 집 당 보통 세 통, 부잣집은 다섯 통을 튀겼으니 아저씨는 족히 사흘 내내 튀겨야 다른 동네로 떠났다. 튀긴 값으로는 돈이 귀했으므로 콩이나 팥으로 대신 주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저씨가 들어오면 미리 준비한 옥수수를 갖고 왔다. 그것이 튀겨질 때가지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고, 옥수수자루들은 각기 이름표가 달려서 줄지어 앉았다. 그러면 아저씨는 순서대로 튀겨놓으면 되었다. 나중에 대략 튀길 시간이 되면 찾으러 오거나 아이들을 보내 찾으면 되었다. 아이들이야 별로 놀이거리도 없는데다 옥수수 뻥을 튀기는 것이 신기하니까 하루 종일 마당가에서 놀았다. 뻥이 터질 때면 귀를 막았다 놓는 재미를 즐겼고 어쩌다 망에서 벗어나 땅에 튀어 오르는 광재를 주워 먹는 재미로 자리를 지켰다. 아저씨도 아이들이 주에 놀고 있으면 좋아라 하셨다. 가끔 나무를 날라 오도록 시키고, 광재 자루를 지붕 아래 옮기도록 시켰다. 아이들은 군말 없이 신이 나서 그 일을 도왔다.

 

뻥을 튀기려면 미리 옥수수 중에서 잘 익은 것을 골라서 아주 바싹 말려두어야 했다. 그렇게 바싹 말린 것을 세 방을 튀기려면 여섯 되를 가지고 가면 되었다. 아저씨가 가지고 다니는 두 되가 들어가는 검정색 깡통이 있었는데, 거기에 담으면 약간 덜 찰 정도였다. 거기에 옮겨 담은 아저씨는 옥수수가 잘 말랐는지를 확인했다. 잘 마르지 않은 걸 튀기면 제대로 안 터지고 그야말로 옥수수 군 것처럼 나와서 실패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사카린을 얼마간 넣고 섞은 다음, 또는 감미를 섞은 다음 잘 저은 다음에 통에 넣으면 튀길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마당가에 잘게 잘라놓은 장작개비를 튀김통 밑에 있는 불통에 넣고, 통을 돌리면 바람을 일으키는 작은 풍구 같은 것이 함께 돌아가도록 연결한 굵은 고무줄이 감긴 손잡이를 돌렸다. 계기판에 온도를 확인하는지 가끔 그것을 들여다보던 아저씨는 터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는 통 입구에 뻥받이 철망을 씌웠다. 뻥받이는 앞부분은 철망으로 되어 있고 뒤에는 마대자루가 달려 있었다. 그것을 잘 들이댄 다음, 쇠꼬챙이 두 개를 어찌 걸고 힘을 주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들어갔던 옥수수가 뻥튀기가 되어 망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면 일시에 뒤쪽 자루가 불룩해졌다. 그것을 자루에 담으면 한 방의 완성이었다. 그렇게 세 방이면 커다란 자루에 가득했다. 그 정도면 겨우 내내 먹을 과자였다.

 

하여 겨울이면 뻥쟁이 아저씨가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옥수수 알들이 들어가 커다란 과자가 되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귀를 막았다 여는 재미도 있었고, 어쩌다 튀어나오는 광재를 주워 먹는 즐거움도 있었고, 아이들과 종일 그렇게 한 곳에서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다. 그만큼 먹거리도 적었고, 놀 거리도 없는 탓이었다.

 

지금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뻥을 튀겨도 손으로 손수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동으로 돌아간다. 뻥 소리도 예전처럼 크지 않아 놀랄 일도 없다. 다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 가끔은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추억이랄 것은 없어도 옛 흑백사진처럼 가끔은 꺼내보고 싶은 풍경이다. 모두가 다 옛 풍경이고 옛사람일 터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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