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4- 그래도 나 때는 그랬지

영광도서 0 507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젠 옛말이라고들 자조한다. 하긴 개천에서는 잘 나와 봐야 미꾸라지나 나오면 다행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리는 없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알레고리이거나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삶의 조건으로 따지면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나으면 나을 테지만, 요즘은 부모 잘 만나고 출신 신분이 좋아야 오히려 줄을 따라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긴 하다. 줄도 없고 돈도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으니, 세상은 오히려 이전만도 못한, 거꾸로 돌아간다. 보다 나은 제도, 보다 나은 정체, 기회의 평등이니, 과정의 공정이니, 결과의 정의니 구호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 세상은 구호와는 달리 거꾸로 간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그런 구호는 통할 수 있어도 그 그룹에 들지 못한 이들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래도’란 희망 고문만 있을 뿐이다.

 

돌아보면 ‘나때’는 모두 조건이 대동소이했다.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아니 자기 노력에 따라 미꾸라지 용 되는 이도 있었고, 비록 개천보다 못한 환경에서도 의지와 노력으로 남 못지 않은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인 이들도 꽤나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 때, 나 때는 삶의 조건이 아주 안 좋았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도 한 반, 보통 50명에서 70명에 이르는 한 반에 한둘뿐이었고 나머지는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 역시 한 반에 한둘뿐이고 나머지는 옷핀을 이용해 책보에 책을 싸서 다녔다. 특히 학용품만 봐도 그랬다. 제대로 학용품을 갖춘 아이들은 반에서 한둘밖에 없었다. 학용품 중에서 적어도 노트와 연필, 크레용만 봐도 그랬다.

 

나라고 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노트 한 권에 전 과목 공부는 물론 숙제도 함께 했다. 때문에 숙제 검사 시간에는 숙제한 부분을 따로 펴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선 3원짜리 노트, 5원짜리 노트, 10원짜리 깍두기 노트를 팔았다. 학년말 우등상을 타면 10원짜리 노트 두 권을 받았다. 그러면 이 노트 한 권에 전 과목 숙제를 했다. 그만큼 노트가 귀했다.

 

선생님은 매번 숙제를 내주셨고, 나는 꼬박꼬박 숙제를 잘했다. 특히 산수문제는 아주 잘 풀어서 선생님으로부터 산수박사란 별명을 얻었다.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미리 공부했다가 처음 문제를 소개하시면서 나와서 풀어보라시면, 앞에 나아가 칠판에 선생님이 쓴 문제를 여지없이 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아침이면 내게 몰려들었다. 미처 숙제를 해오지 못한 아이들이 내 노트를 보고 베끼기 위해서였다. 물론 우리 반 아이들 중에 전과를 가진 아이가 둘 있었다. 그 아이들의 전과에는 문제와 해답이 있을 터였지만, 내 노트만 보려했다. 그렇게 보여주면 아이들은 나중에 건빵도 주고 사탕도 주었다. 물론 그것을 받는 재미로 보여준 것은 아니었고, 나는 거절을 하지 못했다. 대신에 내 옆에 앉는 친구,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위였지만 같은 학년이라 우리 반 짱인 친구가 정리를 해주었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힘은 약했지만 한 번도 아이들한테 맞고 다닌 적은 없었다. 나는 공부로 돕고 그는 힘으로 도운 짝꿍이라면 짝꿍이었다.

 

너트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술시간이면 참 곤란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나는 더했다. 그때는 10원이면 열두 가지 색이 담긴 크레용을 살 수 있었다. 20원이면 좀 더 크고 좋은 16가지 색이 들어 있는 크레파스를 살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12가지 색이 들어 있는 크레용 이상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극서도 닳고 닳아서 몽당연필처럼 작아진 조각들이 전부일 때가 많았다. 그때쯤이면 제일 많이 쓰는 색깔은 없어졌고 주로 쓰지 않는 회색이니 흰색이니 그런 색만 몽당연필만큼 남아 있었다. 하여 아이들이 작아져서 버린 것들을 주워 모아 담아가지고 다니다 보니 같은 색깔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끈질기게 가지고 다녀야 했던 이유는 가끔 학용품 검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가지고 가야 매를 맞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연필도 귀했다. 연필 하나 사면 작아지고 작아져서 손에 잡을 수 없을 즈음이면 153모나미 볼펜 껍질에 끼어서 사용했다. 그런 몽당연필 하나로 모든 필기를 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잉크를 사용했다. 그나마 잉크는 가격이 쌌고,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펜대를 사용할 수 없으면 다 쓴 볼펜 뚜껑에 펜촉을 끼어 잉크를 찍어 사용했다. 잉크 관리는 잘해야 했다. 아무리 잘 닫아서 가지고 다녀도 어디론가 잉크가 새서 책보를 버리는 것은 물론 책에 잉크가 온통 묻곤 했다. 하여 잉크병 뚜껑 아래에 스펀지를 오려 안에 넣고 뚜껑을 닫곤 했다. 잉크를 사용하다 보니 손에는 늘 잉크가 묻어 있곤 했다.

 

특히 나는 학용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전형적인 아이였다. 성적통지표에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내는 통신란에 늘 단골로 빠지지 않는 선생님의 지적사항이 적혔다. “성적은 반에서 최고 우수합니다. 학용품을 사주세요.” 이런 문구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빠진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나는 흙 수저 중에 흙 수저였다. 돌아보면 지금보다는 나았다. 나 같은 미꾸라지도 용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있었다. 단순한 희망고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다. 어디에든 줄이야 있어서 보다 쉽게 길을 가는 아이들도 없기야 했으랴만 적어도 지금보다 기회는 열려 있었던 것 같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모 마음이야 다를 바 없을 테지만, 나 때는 부모에게 그다지 도움을 받지 않고 그럭저럭 제 길을 개척하며 그런 대로 잘 살아왔다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충부하게 뒷바라지를 못해 준 것 같아 미안하다. 유학 생활을 늘렸으면 하는 큰딸을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해야 했으니, 작은딸은 스스로 진학보다 취업을 우선 택하겠다는 것을 말릴 수 없었으니. 줄도 없지 돈도 많이 없지, 그런 게 딸들에게 죄책감이 든다. 나 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조건을 제공한 것은 사실일 테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다. 줄도 없고 돈도 없는 부모를 죄인으로 만든다. 중학교 진학조차 못 시킨 우리 엄마와 아버지도 지금의 내 마음을 보면 마음 많이 아프셨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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