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7- 메밀꽃 필 무렵이면

영광도서 0 740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이효석 선생님의 <메밀꽃 필 무렵>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목,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묘사 부분이다. 작가의 의도는 성처녀와 하룻밤을 회상하는 허생원의 심리를 바탕에 깔고 있으나 얼핏 읽으면 아주 건전한 듯 보인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와 푸른 밤의 분위기를 보면 허생원과 성씨 처녀와의 하룻밤의 잊을 수 없는 정사를 느낄 법하다. 붉은 대궁에다 위에는 흰 꽃, 어쩌면 서로 첫 경험의 순수 밑에 짐승 같은 정욕이 붉게 우러나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묘사가 참 멋지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소금을 뿌렸다기보다는 늘 엄마의 하얀 광목치마가 펼쳐진 듯하다는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메밀꽃, 우리 살던 곳에선 얼마든 메밀꽃을 만날 수 있었다. 곡물 중에 가장 수고를 덜하고 게다가 짧은 기간에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곡물이라서 메밀을 심지 않는 집이 없었다. 하여 추석 무렵이면 온 동네 어디를 가든 메밀꽃을 얼마든 볼 수 있었다. 그것도 환한 달밤에 메밀밭을 보면 정말 아름다웠다. 마치 하얀 광목천를 들에 덮은 듯이 온통 하얗게 빛났다. 달밤이 메밀밭을 아름답게 해주는지, 메밀밭이 달밤을 아름답게 꾸며주는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달밤과 메밀꽃은 아주 잘 어울렸다. 달밤엔 잘 안 보이지만 낮에 보면 메밀은 대궁은 붉고 꽃은 희었다. 때문에 메밀꽃은 밤에 보거나 낮에 보거나 볼만 했다. 그것도 혼자 따로 피면 별로 볼품이 없을 듯한데, 밭에 가득가득 모여서 피어 아름다웠다.

 

메밀꽃은 보기와는 달리 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인분 냄새와 흡사한 향을 뿜었다. 그렇다고 인분 냄새처럼 피하게 만들거나 질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향을 맡고 싶지는 않았다.

 

메밀, 여름이 지나면서 감자를 캔 밭엔 메밀을 심는 게 제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 딸려서 그냥 버려두었던 묵밭에도 메밀을 심는 게 제격이었다. 메밀 농사는 아주 단순하고 쉬웠기 때문이었다. 메밀을 심으려면 쑥밭 같은 버려진 풀밭을 일단 낫으로 풀을 잘라내야 했다. 그 다음엔 괭이로 파헤치거나 소에다 쟁기를 채워 갈거나 하여 심을 준비를 했다. 밭이랑을 곧게 낼 필요도 없었다. 풀밭을 뒤집어 흙이 검게 보일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한 다음엔, 아니 그 전에 뿌릴 씨앗을 준비해야 했다.

 

씨앗을 뿌릴 준비를 위해선 우선 메밀을 준비하고, 메밀을 섞을 인분재가 필요했다. 방법은 잿간에 있었다. 우리 때엔 화장실이 아니라 잿간이었다. 지금은 처가와 화장실은 가까울수록 좋지만 그때는 화장실은 아니 잿간은 멀수록 좋았다. 집에서 십여 미터는 족히 거리를 두고 잿간을 마련했다. 그렇다고 건물이라기보다 밑 부분엔 돌담을 1미터 이하로 쌓고 그 위는 옥수수 섶이나 볏짚으로 비만 새지 않도록 두르면 되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소나기가 내릴 때면 비가 줄줄 새긴 했다. 입구는 거적을 늘이거나 아니면 문이 없었다. 인기척으로 접근을 막고 볼일을 보는 구조였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면 높이가 30센티미터의 양쪽 발 디딤돌을 놓았다. 마치 돌다리처럼. 그 위에 앉아 볼일을 보면 되었다. 디딤돌 앞에는 불을 때고 난 후에 남은 재를 가져다 부어 두었다. 때로 불씨가 남은 재를 부었다가 바람이 일거나 재에 검불이 떨어져 불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여 잿간은 본채와 멀리 두어야 했다. 자칫 잿간의 화재가 본채의 화재로 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볼일을 본 다음, 앞에 망가진 부삽으로 재와 변을 섞어 뒤로 던져 놓으면 변과 뒤섞인 거름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쌓인 거름들은 봄부터 농사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바로 이 변이 섞인 재거름이 메일을 심을 때 필요했다.

 

잿간에서 거름을 마당에 퍼낸 다음 그 거름에 비료도 섞고 메밀을 섞는다. 골고루 섞인 거름을 소쿠리에 담아 짊어지고 메밀 심을 밭으로 간다. 소쿠리에 담긴 메밀 섞인 인분재를 삼태기에 옮겨 담은 다음, 풀밭이 변해 검게 흙을 드러낸 묵밭에 골고루 뿌린다. 다른 곡식들처럼 이랑을 따라 뿌리지도 않는다. 그냥 이랑과 관계없이 골고루 밭에 떨어지게 뿌린다. 물론 인분 냄새가 풀풀 풍긴다. 뿌려진 씨앗을 심을 때도 다른 곡식들은 정성스럽게 묻어야 하지만 메밀은 쇠스랑이나 괭이로 대략 긁듯이 흙과 뒤섞이게 하면 된다. 그렇게 메밀 심기는 끝난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메밀을 싹을 잘 내었다. 자라기도 쉽게 자랐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메밀은 잘 자랐다. 경작 기간이 짧기 때문에, 게다가 가을에 들어서는 계절이라 김을 매줄 필요도 없었다. 일모작이 끝났거나 묵밭으로 남아 있을 땅에 심을 수 있는 작물이 메밀이라서 추석 무렵이면 온 동네 어디서든 메밀밭을 보기를 쉬웠다. 냄새는 역하지만 달밤에 메밀밭을 지나노라면 달에 빛나는 엄마가 늘 입고 다니시던 하얀 광목치마, 정갈하게 잘 빨린 광목치마를 펼쳐놓은 것처럼 온통 하얀 물결이 일렁거렸다. 하늘엔 누르스름한 달, 대지엔 흰 광목처럼 하얀 들판, 여기에 바람이 일면 흰 물결처럼 일렁이는 메밀밭,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이때쯤일 것 같다. 메밀을 심을 시기가. 아니면 곧 일 것 같다. 추석 무렵이면 늘 메밀꽃이 누우런 달밤을 하얀 달밤으로 만들어주곤 했으니까. 메밀을 심을 때면 남의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여 소를 얻어다 밭갈이를 안 하시고 괭이로 밭을 일구고, 인분이 섞인 재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잿간에서 퍼내서 마당에 이만큼 쌓아 놓으신 다음, 아무 말씀 없이 비료를 섞고 메밀을 섞은 다음, 삼태기에 인분 재에 섞은 메밀을 혼자 모든 과정을 해결하시던 아버지, 그렇게 아버지가 심어 놓은 너덜이자 비탈 밭엔 메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었지. 아버지의 손길로 이루어 놓은 지상의 하얀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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