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4- 재건중학교에 들어갔지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있지만 지난 것은 지난 것으로 끝이다. 다시 뒤집어지거나 바뀔 수 없다. 한 개인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이란 무익하다. 리허설도 없다. 실전에 부딪치며 살 뿐이다. 후회한들 소용없다. 무엇이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금의 삶이 어떠하든, 과거의 선택이 어떻게 나를 이끌었든 후회한들 소용없다. 올라갈 때 못 본 꽃은 다시 못 본다. 그냥 지날 뿐이다. 그러니 지난 일은 후회하지 말 것이며, 오늘을 만족하며 살 뿐이다.
열네 살 인생, 애매한 나이였다. 농사꾼으로 당장 편입되기엔 애매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선지 몰랐지만 누군가 재건중학교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우리 집에서 오솔길을 따라 1킬로미터 가량 내려가면 광암리에서 내려오는 군사비상도로인 신작로가 있었고, 그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면소재지였다. 면소재지 입구에 내촌중학교가 있었고, 하천 건너편 언덕에 내촌감리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에서 재건중학교를 운영한다는 거였다. 물론 정규과정은 아니었다. 여기를 졸업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했다. 교사들도 정식 교사들이 아니라 그냥 뜻 있는 젊은이들이 봉사하는 거였다.
중학교를 마주보는 곳에 재건중학교에 일단 입학했다. 건너편 아이들은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쓰고 책가방을 들고 폼 나게 다녔으나, 나는 책보에 책을 싸서 다녔고 복장 역시 그냥 평상복일 입고 다녔다. 왠지 창피스러웠다. 게다가 재건중학교에 가려면 길옆에 사는 낯선 아이들이 이유 없이 따라다니며 놀려댔다. 나는 그 바닥 아이가 아니었고, 산속 아이기 때문이었는지, 정식 중학교에 다나는 아이가 아니라서인지 오갈 때마다 아이들이 나를 따라다니며 놀려댔다.
20여 명의 아이들이 우리 반이었다. 나는 공부를 아주 잘했다. 교사들이 무척 아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바닥 아이들이라 문제가 없었는데 나는 혼자 오가다 보니 아이들이 놀려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것마저 견뎌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다 집 못 미쳐 백여 미터 앞두고 멋진 폭포가 있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폭포 아래 바위에 앉았다. 그런데 그곳에 앉아 괜히 눈물이 나왔다. 열네 살 그 나이에 인생의 무엇을 알겠다고 그런 것 몰랐지만, 왠지 서러웠다. 아무도 없어서인지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참으려 해도 참지 못하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마치 내 인생의 지난함을 예고라도 했던 것인지.
그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며칠 후 같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 하나와 선생님이 친히 우리 집에 찾아왔다. 공부를 잘하는데 왜 학교에 오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냥 울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학교에 잘 달래서 보내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나의 중학교 생활은 그 한 달로 끝이었다. 학생이면 누릴 수 있는 특권도 이제는 포기해야 했다. 학교에 가는 대신 밭에 풀이라도 뜯어야 했고, 소꼴이라도 베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도 공부와는 멀어져야 했다. 대신에 마음먹기로는 중학교 과정 강의록을 사고 혼자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서울중고등통신학교 강의록은 청 열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중고등통신학교 강의록은 가격이 보다 저렴했다. 서울강의록을 목표로 돈을 한 푼 두 푼 모았다. 한 해가 마무리 될 즈음 이삭줍기를 하며 간신히 강의록 값을 마련할 수 있었다. 송료 포함 13,500원, 그걸로 책을 주문하려 했는데 푼푼이 모아두었던 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 년 동안 모아두었던 돈이었는데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바로 아랫동생이 사탕을 사먹은 것을 보니 심증은 가는데 물중이 없었다. 동생을 잘 설득해서 혼내지 않을 테니 고백하라 했더니 그 돈을 가져다 친구들과 과자를 사먹었다는 거였다. 그걸로 내 꿈은 다시 깨졌다. 간신히 남은 970원으로 할 수 없이 중앙강의록 한 학기 분을 구입해서 독학이라고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일 수 있는 중학교 진학, 내게는 꿈이었다. 쉽지 않은 요원한 꿈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 깜빡이는 등잔불 아래서 막연하게나마 나는 통신학교 학생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밤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재건중학교에 계속 다녔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책임질 테니 중학교에 일단 들어가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따랐더라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건 단순히 추측일 뿐, 인생을 어찌 알겠는가! 집으로 돌아오다 폭포 아래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 포기한 중학교 과정, 그 이후부터 내 삶은 어쩌면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으리라. 그렇다고 그때 그 울음을, 그때 포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았든 나는 지금의 나로 만족하니까. 인생에 리허설은 없다. 잘났든 못났든 언제나 지금, 지금의 내 삶을 내가 위로하며 내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