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5- 농목하기, 겨울에 마련하는 땔감
언제쯤이면 내 모두를 솔직담백하게 털어내면서 살 수 있을까? 이것저것 그 무엇도 감출 것 없이 담담하게, 솔직하게 모두를 털어내기란 쉽지 않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건 창피한 일이건 상관없이 마음에 쌓아둘 것 없이 다 털어내고 담백한 삶을 살고 싶다만, 아직은 그런 것 같지 않다. 내가 쓰는 이 글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듣거나 목격하거나 체험한 일임엔 틀림없지만, 그다지 미화한 것은 없지만 이제는 안다. 다 들어내어 쓸 수 없음을. 아직은 쓸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그 진실들이 누군가에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게 말이 아닌 글이기에 조심스럽다. 어쩌면 가장 절절하고 가장 극적인 일들이지만 아직은 그 이야기들을 가슴에 묻어두련다. 언젠가 기회가 없을지 모르지만 모두 탈탈 털어낼 수 있는 날들이 내게 주어지기를.
초등학교 졸업 이후의 기억들은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과는 많이 다르다. 초등학교 졸업 전이라면 비록 내 개인의 일들이라도 동시대를 산 아이들의 보편적인 일들이었다면, 초등학교 이후의 일들은 보편적이라기보다 개인의 특수한 상황, 특별한 일들이다. 때문에 쓰고 싶은 일들을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것만을 취사선택해서 쓸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특별한 일들이랄까, 특이한 이야기들, 어쩌면 타인들에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덮어두고 나 개인의 일들만을 일단은 써 나가련다.
공식적인 공부를 포기한 후 어리지만 농부수업을 받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럼에도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작은형을 따라다니며 소꼴을 베는 일, 산에서 땔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겨울이면 무엇보다 우선 한해 땔 나무를 미리 마련해야 했다. 광암리 살 때보다 땔감을 마련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깊은 산속에 집이라곤 우리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이웃과 경쟁할 필요 없이 얼마든 나무를 할 수 있었다. 땔감이면 무엇보다 장작이 좋았다. 장작을 하려면 죽은 나무를 베어야 했다. 주로 소나무가 죽은 것을 찾아서 베어다 장작을 하여 처마 밑에 쌓아두었다가 주로 술죽을 끓이거나 두부를 하거나 엿을 고을 때 사용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은 생나무를 채취하였다. 주로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 소나무는 베어선 안 되었다. 대신에 소나무 사이사이에 나오는 참나무를 비롯한 잡목들을 간목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무들인 해마다 간목하기 때문에 크지 않았다. 때문에 나무를 할 때 가장 쉬게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나무들이었다. 이 나무들 중, 자작나무와 싸리나무는 생나무도 잘 탔으므로 이런 나무들은 따로 분리하여 단을 묶었다가 당장 땔감으로 사용했다.
겨울에 준비하는 농목 중 가장 좋은 나무는 역시 소나무였다. 그렇지만 소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다. 하여 소나무 가지만 쳐서 땔감으로 만들었다. 해마다 가지를 치다 보니 칠 수 있는 가지는 점차 높아졌으므로 겨울이면 가지치기를 위해 소나무에 기어올라야 했다. 기어올라 윗부분에 3-4층의 가지들은 보존하고 밑에 있는 한두 층의 가지들을 잘라서 밑으로 떨어뜨려서 나무를 해야 했다. 힘들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나무를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일정지역의 소나무에 오르내리면서 가지치기를 한 다음, 쳐낸 가지들을 채취하여 나뭇단으로 묶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럴 때면 작은형이 나무에 잘 오르내렸으므로 작은형 가지치기를 했고 나는 밑에서 잘린 가지들을 착착 다듬어서 나뭇단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했다. 가지치기를 할 때면 바짝 자르지 않고 다음해에 오르기 좋도록 발 디딜 만큼 남겨두고 잘랐다. 그러면 남은 잘린 부분은 소나무 스스로 진을 내어 무척 단단한 채로 남아서 다음해에 다시 오를 때 딛고 오르기 쉬웠다.
소나무 가지치기는 소나무에게도 좋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소나무는 스스로 아랫부분부터 나뭇가지를 스스로 죽여서 버린다. 그렇게 죽어서, 삭아서 떨어지면 나뭇가지가 있던 곳엔 진이 나오지 않아 툭 건드리기만 해도 삭아서 흔적만 남긴 채 떨어졌다. 때문에 그렇게 오래 된 나무들은 딛고 올라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가지치기를 하여 땔감을 하면 해마다 나무하기가 쉬웠다.
겨울은 농번기가 아니라서 비교적 한가했지만, 새로 이사를 간 우리는 더 없이 바빴다. 새로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멀리로 돈을 만들기 위해 남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열일곱 살의 작은형과 열네 살의 내가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열네 살의 겨울, 나와 작은형은 매일 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했고 드디어 커다란 나뭇가리를 한 가리 집 옆에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식적으로 처음 배운 일이라면 일이었다. 서툰 솜씨로 나무를 하려니 왼 손에 무수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오른손으로 낫을 다루다보니 항상 피해를 입는 건 왼손이었다. 겨울이면 나무들이, 특히 소나무는 탱탱 얼어서 낫으로 내리치면 낫이 들어가지 않고 튀어 올랐다. 그럴 때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왼손에 낫날을 맞으면 손가락에 상처를 입기가 다반사였다.
열네 살의 겨울, 항상 생각이 많았던 나, 그해에 나무를 하면서 깨달음이 있다면 쟁기를 든 손은 다치지 않으나 쟁기를 들지 않은 손이 다친다는 걸, 소나무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스스로 나뭇가지들을 떼어낸다는 걸, 그렇게 떼어낸 가지들은 머지않아 흔적도 사라진다는 걸, 대신에 강제로 가지를 쳐내면 스스로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진을 내어 단단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는 나무하기가 쉽지 않았고 땔감이 귀했던 시절, 지금도 산에 다니다 죽은 나무들을 보면, 여기 저기 쓰러져 죽은 나무들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좋은 땔감들이 썩어가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