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2- 아버지의 자살소동

영광도서 0 539

사람은 닮는다. 좋아하면서 닮고 미워하면서 닮는다. 존경하면서 닮고 경멸하면서 닮는다. 때문에 사람에겐 환경이 중요하다. 주변에 누가 있느냐,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느냐가 그만큼 중요하다. 지금의 나도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닮아온 존재이다. 내 모습 속엔, 내 품행 속엔 아버지가 있고 엄마가 있다. 엄마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니까.

 

아버지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법 없이도 살 양반이었다. 우리가 평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 모두 아버지를 그렇게 평했다. 소외 외부의 평가였다. 하지만 우리 집 내부로 들어오면,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성품이 좋을 수는 있어도 아버지는 무능했다. 술을 좋아하시는지라 좋은 게 좋은 걸로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사셨을지 몰라도,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버지셨다.

 

그렇게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버지는 전혀 나서지 않으셨다. 오롯이 문제 해결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사람 좋다, 법 없이도 살 양반이라고 평하면 할수록 엄마는 은근히 화를 내곤 하셨다. 엄마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그런 분이 아니셨고,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보다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음에도 악역은 엄마의 몫이었으니 짜증이 날만도 하셨다.

 

작은누나 혼사 문제도 그랬다. 아버지가 술김에 저지른 문제였다. 그 일로 엄청 큰 재정적 손실을 입어야 했다. 아직 제 밥벌이 하는 자식도 없었다. 큰형은 공부한답시고 어떻게든 집에서 돈을 가져가면 가져갔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큰누나는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남의 사람 되었으니 도움이 안 되었다. 그나마 작은누나가 서울에서 식모살이 할 때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만 잠시 집에 왔다가 혼사 문제로 이 지경을 겪었으니, 게다가 작은형이나 나는 아직 밥벌이하기엔 어렸다. 파혼으로 생긴 25,000원 큰돈이었다.

 

그 일로 엄마와 아버지는 어느 밤 조금은 심하게 다투었다. 소위 부부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 부부싸움에 비하면 싸움도 아니었다. 엄마는 평생 아버지께 반말을 하시는 적이 없으셨다. 항상 존대를 쓰셨다. 부부 싸움을 한들 조대를 쓰며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따지는 식에 불과했으니 큰 소리를 내지도 않으셨다. 아버지 역시 평생 상스러운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우리에게도 아무리 화가 나셔도 ‘새끼’ 소리도 하지 못하셨고 한 번도 매를 드신 적도 없으셨다. 그러니 말이 부부싸움이지 싸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으신 듯 했다. 아무리 문제를 저질러도, 그 문제를 묵묵히 해결하시면서도 엄마는 아버지에게 가타부타 원망을 하지 않으셨는데, 이번엔 그 일로 아버지께 처음 따져 물으셨으니 충격을 받으셨을 터였다. 이 일로 엄마는 얼마나 고심하셨으며, 얼마나 수모를 당하셨던가, 엄마의 입장을 나는 어렸지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난 싸움으로 화를 내시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하시곤 밖으로 나가셨다. 휘황찬란하게 달이 밝게 비추는 아직은 쌀쌀한 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나를 깨우셨다. “네 아버지가 나가서 안 들어오시니 네가 나가서 잘 달래드려서 모시고 들어와.”라고 하셨다. 그때도 엄마가 나에게 그 일을 맡기신 걸 보면 엄마는 나를 믿으셨고, 물론 나는 엄마 말씀을 아주 잘 듣는 편이긴 했다. 엄마의 말씀에 따라 밖으로 나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멀리 가신 것도 아니었다. 달빛 비추는 봉당에 소를 매는 밧줄을 움켜잡고 게셨다. 그걸로 목을 매 자살하시겠다는 거였다. 아버지 옆에 가만히 앉았다. 아버지를 조용히 설득했다. 그리고 슬쩍 아버지가 움켜 쥔 밧줄을 잡아당겼다. 아버지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시고 밧줄을 놓으셨다. 들어가시자면서 은근히 힘을 가해 아버지를 일으켰다. 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어선 후 은근히 방문을 열고 아버지를 밀었다. 아버지는 못 이기시는 척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걸로 하룻밤의 소동은 끝났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이 가장 심한 다툼을 한 건 내 기억으로는 그 한 번이었다. 많은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사셨을 엄마와 아버지, 두 분은 싸움다운 싸움을 한 적이 없으셨다. 그렇다고 서로 다정다감한 사이도 아니셨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서로를 아끼셨다. 옛사람들의 은근한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나 역시 부부싸움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불평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고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게 아내 아니던가. 아버지를 닮아서인가 몰라도 그런 면에서 나 역시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험한 말을 한 적은 없다. 비록 부부싸움을 한다 해도 의견대립으로 다투다 말 뿐이다. 그나마도 나이가 드니 모두 이해할 만한 일들이라 싸울 일이 없다. 서로 의지하며 서로에게 존재함으로 고마워하며 살아갈 일이다. 사랑스러운 딸들을 낳아준 이가 또한 아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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