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8- 탕자 돌아오다!

영광도서 0 908

학원 내에서 특별히 내 자리는 없었다. 자리가 없을 만큼 바쁘기도 했다. 학생들 수업이 시작되면 가끔 계단 청소를 해야 했다. 한 번은 물을 양동이에 담아 윗계단부터 내려오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위에 계단에 물을 조금 붓고 빗자루로 쓸면 계단이 잘 닦였다. 문제는 위에서 조금씩 부으면서 청소를 하면서 내려오다 보면 물의 양이 늘어나면서 계단을 흐르는 물이 톡톡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차락차락하면서 흘렀다. 그런데 하필 아래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계단을 올라오다 찰락찰락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아가씨의 스타킹에 튀었다. 당연히 아가씨는 내게 불평을 했고, 나는 가만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부원장이 나와서 “얘가 어제 시골서 올라와서 잘 모르고 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는 말로 무사히 넘겼다.

 

학원 건물은 밖에서 볼 때는 한 건물인데 안에 들어가면 건물 중간에 삼각형 모양의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빈 공간이었다. 부원장은 사무실에서 물을 쓰면 위층에 있는 화장실에 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버리는 거였다. 나도 청소하다 물을 버릴 때 이곳에 버렸다. 물은 아래 보이지 않는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머니 두 분이 쫓아 올라왔다. 건물 아래에서 식당을 하는데 여기서 버리는 물이 요리하는 곳으로 튀어든다고 항의했다. 그날은 내가 물을 버린 것은 아니었고 부원장이 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원장을 또 내 핑계를 댔다. “얘가 어제 시골서 올라와서 잘 모르고 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 이 말은 묘한 힘을 발휘하여 무사히 넘어갔다. 나야 그냥 못 들은 체 했다.

 

이런 청소는 물론 화장실 청소도 내 몫이었다. 급사란 직업,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어쩌다 조금 쉬고 있으면 “최군”이란 부름과 함께 심부름을 나가야 했다. 시골에서 펜과 잉크는 익히 알았지만 학원에서 시키는 일은 생소한 것들이었다. 매직이니 켄트지니, 쉬운 단어지만 그땜 무척 어려웠다. 그것을 사오라고 하면 입안으로 되뇌이면서 사러 나섰다.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몰라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문방구를 가리키면서 그리 가라고 했다. 시골에선 가게에서 문구도 팔고 과자도 팔고 만화책도 팔았는데 서울에선 오직 문방구에선 문구만 팔았으니 내겐 생소한 일이었다.

 

심부름을 다녀오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지를 그때는 모눈종이면서 등사용 종이를 등사용 펜으로 긁어서 만들었다, 그걸 나한테 시켰다. 나름 글씨를 반듯반듯하게 잘 쓰는 편이었던 나는 그걸 또 잘해냈다. 그 바람에 그 일은 나한테 맡겨졌다. 그렇게 시험지를 긁어 놓으면 등사를 하는 것, 그것도 배웠다. 그냥 먹 밀대를 아무렇게나 밀어선 안 되었다. 중심을 잘 잡아 밀어야 잉크가 번지지 않고 한 장 한 장 인쇄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이면 밤늦게 근무하는 선생은 내게 또 심부름을 시켰다. 한 번은 밖에 나가서 까치담배를 사오라면서 동전 몇 개를 주었다. 당연히 나는 담배 이름인 줄 알았다. 담배가게를 찾아 까치담배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 가면 살 수 있느냐고 했더니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건물 앞에 구둣방에 가라고 했다. 그 앞에 갔더니 구두를 닦는 아저씨가 있었다. 까치담배를 물었더니 담배 두 개피를 내주었다. 그제야 개피로 파는 것을 까치담배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촌놈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려는데 문이 안 얼려 문을 열어달라고 안에서 소리 소리 지른 적도 있었다. 가운데를 누르면 걸리는 문이었는데, 그 작동원리를 몰랐다. 아무리 손잡이를 쥐고 박으로 내밀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나도 모르게 걸어 잠근 셈이었다. 밖에서 선생들이 와서 문손잡이를 이렇게 저렇게 돌려보라고 해서 간신히 탈출했다.

 

낮에 교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타자기 수리를 하거나 기름칠을 하거나 닦아주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나를 선생으로 착각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곤란한 적도 있었다. 해서 배운 거라곤 타자기 분해하고 닦기라든가 어쩌다 잠깐 시간이 나면 주산반에 들어가서 암산원리를 배우거나 보수계산법, 아래쪽에 내 알 주판을 놓은 법 정도를 배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3개 층에 있는 교실들 청소를 혼자 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열두시는 되어야 장의자에 누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제껏 조용한 시골에서만 살다가 시끄러운 서울에서 잠을 자려니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았다. 낮에 가끔 졸면서 잠깐 자는 게 다였다. 그렇게 삼 주가 지나니 코피가 가끔 나왔다.

 

서울에 오면 공부할 수 있다는 큰형의 말은 전혀 불가능했다. 공부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한 달만 채우고 시골로 내려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만 두기 일주일 전 부원장한테 건강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만 두겠다고 했다. 나를 아꼈던 선생들이 무척 아쉬워했으나 가끔 코피를 흘리는 나를 보고는 더는 잡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을 채우고 12,000원을 받았는데, 그중 10,000원은 큰형이 빌려달라기에 빌려주고 2,000원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떠났던 서울, 별로 배운 것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 삶에 소중한 경험일 거라고 위로했다.

 

전화도 없고 달리 연락할 수단이 없었던 시절이라 갑자기 집에 오니 엄마와 아버지가 기뻐 맞았다. 마치 집을 나가 방랑하다 돌아온 탕자와 같은 기분이라면 기분이랄까. 엄마 말씀에 늘 침울해했던 아버지 얼굴에 생기가 돈다고 하셨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아버지가 무척 반기는 걸 눈치 챌 수 있긴 했다. 엄마는 당장에 부침개며 먹을 만한 별식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매일 함께 지내다가 한동안 소식 모르고 떨어져 지낸 날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기쁨, 함께 있을 땐 모르다가 떨어져 지내면 이렇게 그리운 것을. 엄마와 아버지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느낀 그날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 서울엔 가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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