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42- 뼈를 깎는 아픔이라면?

영광도서 0 921

“글을 쓴다는 것, 책 한 권을 낸다는 것은 산고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다.” 참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멋을 낸 적이 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가식적인 문장인가! 부끄러운 문장이다. 산고의 고통을 얼마나 알기나 한다고 비유할 대상에 비유해야지, 출산경험이 없으면서 어떻게 함부로 글쓰기를 산고에 비하다니. 하긴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육아서를 당당히 내고, 결혼도 안 해본 사람이 결혼상담을 곧잘 하긴 하더라만, 실제로느 그 모두가 가식이요 위선이요, 아는 척할 뿐이리다. 체험보다 진실한 앎은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상투적으로 “ 뼈를 깍는 아픔으로”란 문구를 앞세운다. 뼈를 실제로 깎아본 적이 있기나 한지.

 

나는 실제로 뼈를 깍은 적이 있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열여덟 살, 한해농사를 마치고 별일 없이 겨울을 맞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왼쪽 갈비뼈 맨 아랫부분에 작은 혹이 솟아났다. 그렇다고 어떤 아픔은 감지하지 못했다. 다만 겉으로 혹이 나오니 혹시 두려웠다. 당시 김일성의 목 뒷덜미에 혹이 있었는데, 그게 죽음을 부르는 병이란 소문이 있었기에 나도 그런 것 아닌가 싶었다. 속으로는 죽음을 맏아들이고 하면서 죽기 전에 멋진 소설 한 편 쓰고 싶었다.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별>이란 제목을 붙인 소설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마다 혹을 확인하곤 했는데 점점 커지고 있기에 한 번은 그 부분을 살살 두드려 보았다. 두드릴 때마다 아픔이 왔다. 엄마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별다른 말씀 없이 돈 18,000원을 주시면서 병원에 다녀오라 하셨다. 하여 그날로 병원을 찾아 집을 나섰다. 백우산 막침이 집인 우리 집에서 면소재지까지 8킬로미터를 족히 걸었다. 그곳에서 버스 오기를 기다려 버스를 타고 읍내 채 못미처 화촌면사무소 정류소에서 보니 안 쪽에 병원이 보이기에 얼른 내렸다. 병원과 의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지라 병원 표시가 있어 들어갔다. 성산의원이었다.

 

병원엔 환자가 없었다. 들어가니 즉시 절차가 진행되었다. 병상에 눕게 하더니 의사가 혹 부위에 주사기를 꼽더니 고름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널따란 접시에 꽤 많은 양의 고름이 고였다. 그걸 보여주더니 의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하기로 동의 했다. 즉시 수술이 시작되면서 우선 간호사가 모운주사를 놓았다. 그리곤 이내 이사의 수술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엔 수술이란 말 자체가 두려웠으나 막상하려니 처음엔 조금 따끔따끔하는 듯하더니 무감각했다. 수술 별거 아니구나 싶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의사가 뭔가 말하는 듯싶더니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 모두 모여들었다. 그래봐야 네 명이었다 갑자기 왼쪽다리를 간호원 한 명이 힘차게 눌렀다. 오른쪽다리를 다른 간호원이 눌렀다. 가슴 윗부분부터 얼굴까지는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눌렀다. 그러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뼈까지 상했기 때문에 뼈를 갉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빠각빠각 소리와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얼마나 걸렸는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소리와 함께 곧바로 뇌에 전달되는 아픔, 울리는 가슴이며 온몸의 출렁거림, 두모지 견딜 수 없었다 저절로 가슴이 위로 들려 올라가는 기분, 나도 모르게 입에선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실제로는 상스러운 욕 대신 죽어라 참으면서 외치는 소리, 주여, 주여, 주여 그 소리였다. 정신없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얼마나 걸렸는지 수술은 끝났고 내 맨 아래쪽 갈비뼈는 반이 잘리고 말았다.

 

전쟁을 치루고 난 듯한 현장, 뼈는 부분마취가 안 되지만 아마도 수술 중엔 전신마취를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전신마취를 하려면 다시 봉합하고 나서 전신마취를 한 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수술을 하고 난 후의 내 모습은 처참했다. 왼쪽 가슴 아랫부분엔 꿰맨 부분이 제법 크게 보였다. 멀쩡했던 내 몸이 갑자기 환자가 된듯하여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임이 아까와는 달리 부자연스러웠다. 조금 움직여도 욱신거렸다.

 

병원을 나설 시간, 뼈를 깎는 아픔은 말로 할 수 없다. 만일 다시 그때처럼 뼈를 깎아야 한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 것이다. 깎을 때의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도 그 순간이 생각날 때면 앞 머리카락 끝이 하늘로 뻗치는 기분이 2년이 넘도록 났으니 얼마나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었으랴. 지금도 누군가 뼈를 깎는 아픔을 말하면 은근히 화가 난다. 정말 마취하지 않고 뼈를 깎아 보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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