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48-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인연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고 한다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닌 당연히 일어날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잠깐 스쳐간 사람이든 아픔을 주고 간 사람이든, 행복을 주고 간 사람이든 지나간 모든 사람들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뜻이니, 다시 생각하면 사소한 만남도 중요한 만남도 지금 내 삶의 영향을 미쳤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일조했으니 맞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하면 ‘세상은 우연들의 연속이다’라고 하면 또한 맞는 것 같다. 수많은 우연들, 그 우연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 우연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인연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동기 또한 우연인 듯 운명인 듯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년중앙일보에서 한 번 우연히 읽은 동시, 얼마 후 글짓기 시간에 ‘선생님’이란 시를 쓸 때 그 이미지가 마음에 남아 있어 생각나는 대로 동시를 썼다.
선생님
선생님은
선생님은
우리 엄마 같아요.
웃으실 땐 하늘나라 천사 같지요.
선생님은
선생님은
우리 아빠 같아요.
화내실 땐 무서운 호랑이 같죠.
이 동시 한 편 때문에 글짓기 선생님한테 불려갔고 그때부터 동시를 배웠더랬다. 어쩌면 우연이었을 동시 배우기, 그것이 나를 글과 친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그게 그걸로 끝나지 않고, 중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거나 외로운 밤이면 나름 글이랍시고 끼적거렸으니, 글쓰기를 배운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쓰고 혼자 만족하는 글쓰기를 하다가 상대가 있는 글쓰기를 시도했으니 펜팔이었다.
펜팔은 제법 재미있었다. 때로 설렘을 주었다. 미지의 사람들과의 글로 나누는 이야기, 상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펜팔을 했는지 몰라도, 심심풀이로 했는지 몰라도 나는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었다.
진지하게 이어지던 펜팔, 실패하고 나서 다시 라디오에 엽서를 보내면 방송엔 잘 나왔다. 분명히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 소개와 함께 주소도 나갔다. 그럼에도 편지는 별로 오지 않았다. 편지가 온다고 해도 서너 번 편지를 주고받고는 다시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꾸 편지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자존심은 있어서 답장이 오지 않으면 나도 편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었다. 방송국에 엽서를 보낼 때 남자의 이름 최현으로 보내지 않고 최미숙으로 보냈다. 나는 여자인 셈이었다. 그렇게 엽서를 보내고 나니 기적이 일어났다. 일주일 동안 편지가 오기 시작했는데, 무려 스무 통 이상이 왔다. 물론 남자들에게서 온 편지들이었다. 그렇게라도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었으니까. 남자들과의 펜팔, 골라야 했다. 첫째,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반신용 우표를 동봉한 사람, 둘째, 편지봉투나 편지지가 부티가 날 것, 셋째, 나름 글을 제법 쓰는 사람일 것, 이런 기존으로 아주 많은 편지들 중에 다섯 병을 골라 펜팔을 시작했다. 미지의 소녀는 아니었지만 같은 남자로서 남자를 우롱하는 제마도 있었다.
일종의 사기 시작, 그렇게라도 글을 쓰고 싶었던 걸 보면, 초등학교 시절의 글쓰기의 우연은 펜팔로 이어졌으니, 그때 동기가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글로 사기 치는 연습이 나중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했으니 우연이라면 우연들이 모여 필연을 만들어주는 듯싶다. 어쩌면 작가란 말 그대로 글을 지어내는 사람이니, 일종의 사기꾼이라면 사기꾼이겠다. 다만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사기꾼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