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114- 아홉 살 인생, 어느 나이든 인생은 진지한 것!
나이는 어른이어도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있다. 난 그 어른을 어른애라고 부른다. 세상엔 대부분 어른애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아도 누구나 어른애가 많다는 걸 안다고 나는 믿는다. 반면 나이는 어려도 속 깊은 아이를 난 애어른이라고 부른다. 나이는 어려고 속이 깊어서 어른이나 고민해야 할 것을 미리 당겨서 고민하고, 어른이 해야 할 일을 제 일로 알고 그걸 해결하겠다고 속을 끓이는 속 깊은 애어른은 많지 않다. 거의 없다. 어쩌다 그런 아이를 보면 어른애들은 참 기특하다고 말한다.
아홉 살, 여민이는 속이 깊은 아이다. 어른처럼 생각하고 어른처럼 행동한다. 다른 게 있다면 여전히 아이답게 자연을 좋아하고 놀이를 좋아한다. 또 쌈도 잘한다. 쌈은 좋아한다기보다 아주 잘한다. 아무리 자기보다 덩치가 큰 아이라도 그에겐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속 깊은 아이답게 아무하고나 아무 때나 싸우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거나 불가피할 때만 싸운다.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마음을 동시에 지닌 아이, 철이 일찍 든 아이, 어쩌면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아이, 아홉 살 나이의 여민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화면 속에 펼쳐진다.
여민에겐 부양가족이 있다. 물론 그의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민은 그렇게 생각한다. 여민의 어머니는 애꾸눈이다. 때문에 어머니는 외출을 거의 안 한다. 외출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민은 그게 마음 아프다.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얼마든 외출도 하게 해 드리고 싶다. 그래서 그의 꿈은 어머니에게 검은색안경을 사 드리고 싶다.
여민은 어머니를 위해 돈을 한 푼 두 푼 모은다. 가끔 피아노를 잘 치는 동네 누나네 마루를 닦는 일로 돈을 모은다. 공교롭게도 동네 누나를 짝사랑하는 문학청년의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아 모은다. 그럼에도 어머니 안경을 살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여민은 아이스께끼 장사까지 손 댄다.
아이스께 장사를 하다 그걸 알아차린 어머니한테 엄청 매를 맞는다. 아이의 진실, 그걸 안 여민의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아이를 회초리로 엄청 때린다. 아이가 자신의 먼눈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님을 알지만 그걸 구실처럼 때리면서 마음이 아리게 찢긴다. 어머니의 그 마음을 여민은 안다. 때문에 어머니의 모진 매가 아프지 않다. 대신 마음이 아프다. 여민은 매를 맞다 맞다 어머니를 끌어안는다. 어머니도 여민을 끌어안는다. 속 깊은 어머니와 철든 아이가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운다.
여민에겐 어머니 말고 또 다른 부양가족이 있다. 동네 아이들이다. 쌈짱인데다 속이 깊으니 아이들은 그를 의지한다. 골목대장이지만 촌장님 같다. 힘자랑하면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다른 쌈짱이 있다면 여민은 그 아이와 결투하여 그를 제압한다. 친구들을 괴롭히는 쌈짱 ‘검은 제비’를 제압하여 아이들의 평화를 지켜낸다. 그러고도 그는 우쭐해하지 않는다. 지킬 건 아주 잘 지킨다. 여민은 그럴 땐 양아치가 아닌 건달이다. 싸움도 잘하지만 언제나 정의롭고 공정하다. 동네 쌈장을 누른 뒤엔 “내가 이겼다고 소문내지 않겠다. 대신 애들 별명 부르지 마라”고 경고하는 걸로 깔끔하게 끝이다. 그렇게 여민의 동네골목은 평화지대다. 동네 골목은 때문에 그의 세계다. 그의 놀이터다. 그와 일당들의 진진한 놀이터다. 그 골목에서 아이들은 짱을 따르며 의적 임꺽정 놀이도 하고 이런 저런 놀이도 한다.
골목대장이라기보다 촌장, 촌장을 따르는 그를 수족처럼 따르는 그러나 자율적인 아이는 누나와 단둘이 사는 기종이, 그리고 은근히 촌장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시골 소녀 금복이다. 여민은 자기보다 어려운 기종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가 하면 아이들을 괴롭히는 누군가 있으면 그를 혼내주어 평정한다. 게다가 여민은 학교에서도 모범생이다. 받아쓰기도 척척 해내고, 구구단도 술술 외운다. 아이들의 인기도 독차지 하지 공부도 잘하지 부모의 마음도 잘 헤아리지, 그야말로 완벽한 어른 같은 아이다.
그런데 여민에게 사랑이 온다. 깔끔한 차림의 아이, 세련되게 옷을 입은 아이가 여민의 학교로 전학을 온다. 장우림이다. 엄마와 둘이 시골로 온 유림이 여민의 반에 들어온다. 유림은 반 남자아이들의 첫사랑의 대상이 된다. 하필이랄까 다행이랄까 유림은 여민과 같은 책상을 쓰는 짝꿍이 된다. 미국 살다가 왔다면서 폼을 재고 잘난체하는 우림, 그럼에도 여민은 은근히 속으로 유림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대놓고 고백하지는 못하는 대신 이런 저런 트집을 잡는다. 이럴 땐 아이다운 서툰 연애다. 유림 역시 은근히 여민을 좋아하지만 대신 여민을 괴롭힌다. 트집을 잡는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서로 마음을 감춘다. 그 대신 서로 갈등하면서 거리를 둔다. 서로 미워한다.
그가 문학청년 팔봉이 형한테 사랑법을 배운다.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팔봉이 피아노 치는 누나한테 편지를 전해주는 대신 돈을 준다. 여민은 덥썩 돈을 받지 않는다. 처음엔 거절한다. 청년의 눈빛의 간절함을 보고 그제야 심부름한다. 두 번째는 그걸 거절하면서 직접 찾아가서 말로 하지 왜 편지를 쓰느냐고 묻는다. ‘말로 할 수 없는 건 글로 쓰는 거란다’라는 팔봉의 말에서 그는 연애법을 터득한다.
그도 편지를 쓴다. 아직 자기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유림을 좋아한다고, 언젠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겠다고. 그런데 유림은 그 편지를 선생한테 넘긴다. 그 바람에 유민은 앞에 나가 그 편지를 어이들 앞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쪽팔림을 당하고 엄청 매를 맞는다. 둘의 사이는 평행선을 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다 토끼를 놓친 유림이 토끼를 따라가다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 걸 알고는 지체 없이 물로 뛰어들어 구하고는 죽을 뻔한다. 그 바람에 둘은 가까워질 기미를 얻는 대신 유림의 비밀은 드러난다. 그러자 여민은 기종과 금복에게 유림의 비밀을 함구할 것을 명령한다.
그렇게 다시 가까워진 둘 사이, 대신 금복은 질투한다. 은근히 가까워 둘, 여민은 유림을 자신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숲으로 초대한다. 물론 데이트 신청을 먼저 한 것은 유림이다. 그래서 함께 숲에 들어갔다가 똥을 유림이 똥을 밟는 바람에 데이트를 망치기도 하고, 조금 진도가 나가는 듯하다 이런 저런 일로 꼬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난생처음 느껴보는 묘한 설렘, 미워하려도 미워할 수 없는 사이, 조금씩 잘 진행되는 듯, 삐걱거리긴 하지만 조금씩 남다른 관심으로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그만 일이 아주 많이 꼬인다. 유림이 돈을 잃어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책갈피에 넣어두었다는 돈 1100원, 공교롭게도 이제까지 유민이 모은 돈이 1100원이다. 유민은 늘 수중에 품고 다녔는데 하필 돈이 일치한다. 오해를 받을까 겁이 난 여민은 토끼장 풀 속에 숨긴다.
그럼에도 선생은 무조건 여민에게 용의를 둔다. 때문에 여민은 엄청나게 맞는다. 맞는 정도가 아니라 폭력을 당한다. 그렇게 오지게 터지면서도 유민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정직하니까. 유여민이 돈을 감추는 걸 훔쳐본 아이의 고자질로 유민의 돈은 드러난다. 그런데 유림은 그 돈은 자기 돈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 돈은 지폐로 열한 장이었다고, 여민의 돈은 동전에다 지폐에다 다양한 짬뽕식 돈이니까. 그러자 선생은 다른 구실을 붙인다. 이를테면 여민이 전날 안경점에 돈을 갖고 가서 어머니 안경을 사려고 시도했으나 돈이 부족하여 구입 못한 것을 돈세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유림의 돈은 다른 책갈피에서 발견되고 열 받은 금복은 아이들 앞에서 유림의 거짓말을 공개한다. 그걸로 유림은 쪽팔림을 당한다. 그리고는 유림은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가기로 한다. 유림은 마지막 날 아이들한테 자기의 거짓말을 고백한다. 사실은 아빠가 미국에 있지 않고 부재하다는 것을, 금복이도 기종이도 반 아이들 모두 눈물범벅이다. 교실은 눈물 바다로 변한다.
여민은 마음이 아리다. 짝사랑을 하다 자살로 막을 내린 팔봉형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의 아픔,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 뭔가를 해줄 수 없을 때가 가장 아프다는 말, 여민은 편지를 써서 용기를 내어 유림의 집을 찾는다. 초인종을 누른다. 두근두근. 유림의 엄마가 나온다. 들어가지는 않고 유림을 불러달라 한다. 유림이 나온다. 유림이 고백한다. 좋아한다고. 그러면서 너도 나 좋아했느냐고 묻는다. 여민은 말 대신 유림에게 달려들어 뺨에 키스하고는 편지 한 장 손에 쥐어주고는 달아난다. 약속대로 그 사나이의 이름을 밝히겠노라고. 그는 바로 자신 유림을 사랑하는 사나이는 여민이라고.
다음날 유림은 떠난다. 여민은 차마 그녀를 환송하지 못한다.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밖을 내다보며 쓸쓸히 앉아 있다. 그에게 전달해온 선물 상자, 유림의 사랑 고백과 함께 뜻 깊은 선물 하나다. 그토록 여민이 어머니한테 사드리고 싶었던 색안경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이룰 수 있을지 모를 둘의 사랑을 축복하듯 하얀 눈이 펄펄 송이송이 내린다.
그래 아홉 살에도 인생은 있다. 그랬다. 나의 아홉 살, 그렇게 보면 나 역시 속 깊은 아이였다. 부모님 말씀이라면 거역한 적 없었으니까. 엄마한테 매도 많이 맞았으나 그건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게 아니라 나중에 엄마의 실수로 밝혀진 것을 그냥 오지게 맞았다. 엄마가 200원이 없어졌다고 그 죄를 나와 작은형한테 두었다. 나중에 그 돈은 엄마가 쳇바퀴에 넣어두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난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다. 다행히도 오해를 받은 일이 없어서 선생한테는 매를 맞은 기억이 없다. 여민처럼 쌈은 못했지만 한 번 했다하면 그놈이 나보다 세다고 해도 그가 항복할 때까지 싸워서 다음부터는 나를 괴롭히는 놈은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엔 길에 나뭇등걸을 막았다가 트럭이 오면 얼른 치워주는 선행을 하는 척해서 트럭을 타고 신나게 돌아오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동생들까지도. 그럼 나는 의적과는 조금 통하는 것 아닌가.
그때 내게 사랑은 없었다. 난 사랑엔 늦자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난 속 깊고 철이 일찍 난 것 같다. 그때 엄첨 어렵게 살았다. 누나들 모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작은형 역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큰형은 서울에서 고학을 하면서 대학에 다녔다. 큰형 자신도 고생했지만 우리 모두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는 공부하지 않을 거라고. 그때가 2학년 때 내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렇게 일찍 철든 바람에 독학의 길을 걸어야 했으니, 일찍 철든다는 게 인생에 꼭 좋은 건 아니다. 주변을 생각하는 거, 가족을 생각하는 거, 그건 그렇다 치고 나이 들어 어른 되고 나니 그때만큼 철도 안 든 것 같다. 그때만 같다면 세상을 모두 여유롭게 받아들일 만한데, 세상 모두를 품을 만도 한데, 난 여전히 철딱서니 없다. 세상에 분노하고, 짜증내고, 세상 모두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렸을 적 풍경이 떠오른다. 초가지붕 아래 가족들, 어렵지만, 가난했지만 방에는 화롯불에서 김이 오르고 밖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화롯가에 둘러앉은 형제자매들의 모습, 그때는 무척 추고 힘들었으나 지금은 정겨운 풍경화처럼 눈에 어린다. 지금 밖에는 눈 대신 미세먼지로 뿌옇다. 철딱서니 없는 어른애 같은 내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