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양산의 천성산 비로봉에서
사방으로 열린 천성산 정상, 여름 한낮의 열기를 뚫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맛,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 사방으로 눈에 거칠 것이 없이 열린 거대한 산의 지붕 같은 천성산 정상에 이대로 머물고 싶다만, 초록의 평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천성산이란 큰 글자 옆에 원효봉이라 쓴 작은 글씨 새겨진 정상석을 비켜 내려섭니다. 문득 원효봉이란 글씨를 읽으며, 서울 북한산에도 원효봉이 있고, 동두천 소요산에도 원효대사 전설이 얽힌 절 원효사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원효대사가 우리나라 곳곳을 누비고 다니신 것인지, 그만큼 유명한 것인지. 원효대사의 족적이 참 많습니다.
천성산 역시 원효대사의 전설을 안고 있답니다. 원효대사가 이 산 토굴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당나라 태화사 법당에 모인 신도 1000여 명이 산사태로 매몰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을까요. 이를 예견,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함)’이라고 쓴 판자를 날려보냈답니다. 이 판자가 태화사 법당 마당 위를 빙글빙글 돌자, 이 판자를 신기하게 여긴 신도들이 밖으로 나와 웅성거렸답니다. 이때에 절묘하게 산사태가 일어났고, 사태로 법당이 무너졌지만, 신도들이 마당에 나와 있던 덕분에 신도들 모두 목숨을 건졌답니다. 이 인연으로 중국의 승려 1000여명이 원효대사의 제자가 돼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원적산이었으나, 원효대사께서 산 내에 암자 89개를 지어 민중 1000명을 가르쳐 깨달음을 얻게 하였다 하여, 천성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답니다. 낙수사란 절 역시, 원효대사가 당나라의 승려 1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할 때, 당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이름을 낙수사라고 하였답니다. 원효봉 아래 펼쳐진 초록의 평원이 화엄늪이란 이름을 가진 것 역시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겠지요. 이처럼 이 산 곳곳엔 원효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많습니다.
이제 걸어갈 길, 천성산 제2봉 비로봉을 지나 하산 길에 만날 집북재 역시 원효대사의 전설을 안고 있습니다. 산 내에 89암자를 지어 1천 명의 대중을 가르친 원효대사는 설법을 할 때면 한 곳에 모아야 했으니, 그 신호로 큰북을 매달아 놓고 쳤답니다. 그 북소리를 들으면 그 시간에 사방에서 설법 장소인 화엄벌로 모여들었답니다. 화엄경을 설법하던 장소였으니 화엄늪, 설법을 들을 이들은 모이라는 신호로 큰북을 매달아 두었던 곳이라 하여 집북재라 이름이 붙었답니다.
초록의 평원으로 난 길로 걷습니다. 마치 득도한 승려 같은 기분입니다. 마냥 파랗지 않고 아주 아름다운 문양들이 아로새겨진 하늘이 나를 축복하는 듯합니다. 모든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좌우사방이며 하늘까지 아름답습니다. 주변풍경이 아름다우니 마음도 풍경에 물이드는 기분입니다. 기분이 좋으니 힘든 줄 모릅니다. 매일매일이 지금만 같아라 속으로 대화하며 걷다 보니 천성산 지붕 아래로 내려섭니다. 이내 울창한 숲입니다. 간간이 새들어오는 햇살의 줄기들이 숲의 성그런 그림을 그려냅니다. 검은 흙바닥에 아로새겨진 빛살 그림을 밟으며 콧노래를 부르며 걸으면 울창한 숲 속에 그런 대로 넉넉한 평평한 공간, 은수고개입니다.
경사진 길이 닿은 곳에서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이 고개입니다. 때문에 고개는 내리막의 끝인 동시에 오르막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천성산 제2봉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아주 완만한 둘레길과 같습니다. 기분 좋게 바람을 길동무 삼아 잠시 걸으면 별써 정상입니다. 멋진 바위들로 둘러싸인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봅니다. 아름다운 선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들이 정겹습니다. 어디를 보나 초록의 물결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게다가 지난밤에 비 온 끝이라 산 계곡에서 일어나 방랑하는 구름들이 멋진 풍경을 연출해줍니다. 마치 득도를 하려는 이들의 번민하는 마음의 상태처럼 흐트러진 마음의 추스림 같습니다.
신선이기를 그만두고 중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을 시작합니다. 하산이 싫다만 세상이 나를 부르니 중생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 편안한 길입니다. 공룡능선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울창한 숲, 포근한 흙길, 여기 저기 그윽한 계곡, 어머니와 같은 산, 자비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품은 산입니다. 여름을 찬미하는 풀벌레들의 삶의 찬가를 들으며 집북재를 지나 성불암계곡길로 하산합니다. 쫄쫄 거리는 물줄기를 찾아 시원한 물로 고픈 입술을 적십다. 나뭇잎을 따서 물줄기를 만들어 놓고 마시는 물맛, 신주처럼 시원한 물이 속을 훑고 마음마저 촉촉히 적셔줍니다.
너른 계곡으로 나서기 전, 시원한 물이 모인 웅덩이, 물모래가 휜히 들여다 보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얼굴을 적십니다. 물로 젖은 얼굴과 함께 마음 촉촉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이 촉촉함으로 얼마간 내 앞에 펼쳐진 삶은 촉촉하겠지요. 서너 시간의 산행, 참으로 착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 순간이었습니다. 중생으로 돌아가면 다시 오염되어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테지만, 산행을 하면서 갖는 이 선함의 시간, 평화로움의 시간, 어떻게 얻겠어요. 움직이는 자만이, 산에 오르는 자만이, 산에 드는 자만이 얻는 것 아니겠어요. 산을 좋아하는 나, 나는 내가 참 좋습니다. 부럽지요.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