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공작을 닮은 공작산을 오르다

영광도서 0 1,900

제대로 잘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무엇이든 이것 저것 합니다.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직업이 무엇이냐 물으면 잡상인이라고 답합니다. 명색은 시인으로 시작했으나 요즘은 시를 쓰기보다 수필이나 인문 글쓰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다고 직업이 작가냐고 물으면, 이번에는 글쓰기보다는 강의를 더 많이 합니다. 강의 중에 무엇을 더 많이 하느냐 물으면 시 강의를 해야 할 텐데, 시 강의는 거의 못하고 수필쓰기나 생활글쓰기를 합니다. 아니 글쓰기보다 인문학 강의를 하거나 그리스신화 강의 또는 고전읽기 강의를 더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잡상인입니다.

 

 

 

잡상인이 나쁘냐고요? 때에 따라서는 잡상인이 좋더군요. 다양하게 적재적소에서 팔 것이 있으니까요. 덕분에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예수께서도 고향에서는 선지자가 인정 받지 못한다는, 고향에서의 강의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저런 강의를 시작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내 고향 강원도에서는 강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강릉에서 한 번, 삼척에서 한 번, 춘천에서 한 번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내가 자란 홍천에서도 우연히 3년 전에 시작해서 올해로 3년째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내 전공인 불문학 중에 <어린왕자의 사람을 사랑하는 법>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여고 3학년 대상으로 하루는 인문계, 하루는 이과계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홍천청소년수련관에서 강의를 하는 김에 내심 산 하나를 가야겠다 찍었습니다. 마침 하루 강의가 아니라 21일 오전에 한 번, 22일 오전에 한 번이라 어차피 하루를 자야 하니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오전에 끝나도 점심 먹고 나니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홍천에 살면서도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공작산, 내가 정한 산은 공작산, 택시로 움직이면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해도 산행시작은 오후 한시는 되어야 할 터이고, 겨울이라 산행시간은 불과 네 시간 정도겠다 싶었습니다. 때문에 가급적 빨리 정상을 밟고 나서 하산은 비교적 긴 코스로 해야겠다 작정했습니다.

 

 

 

우리 뒷산 백우산도 이제는 300대 명산 안에는 넉끈히 듭니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용소는 관광지로 이름을 제법 떨칩니다. 그냥 우리 놀이터였는데, 다시 가 보면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내가 살던 곳은 백우산 아래,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서둘러 걸으면 20분 남짓이면 백우산 정상 895미터 고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집이 위치한 곳의 고도는 800미터 가까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산이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산에 일부러 가는 게 아니라 일 보러, 이를테면 나물을 뜯거나 더덕이나 약초를 케서 돈벌이나 하려면 산에 올랐을 뿐, 그냥 일부러 갈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시에 나와서 생활하다 보니 내가 살던 곳의 산들이 그립습니다. 홍천에 살면서도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공작산, 일단 택시를 타고 공작재 아래까지 갔습니다. 정상까지는 2.7키로미터라 마음이 놓입니다. 길에 접어듭니다. 사람들의 통행 흔적이 없습니다. 100대 명산 안에 들지만 찾는 이는 별로 없는가 싶습니다. 그늘진 길엔 여지 없이 눈이 쌓여 있는데 새 발자국이나 돼지 발자국, 고라니 발자국은 알아볼 수 있는데,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며칠 째 아무도 안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산 답게 오르막은 제법 있습니다. 볼 거리라면 소나무들, 우리 고유의 적송들이 볼만합니다. 동물 중에 위엄이 있는 동물은 호랑이, 조류 중에 위엄 있는 것은 독수리라면, 나무들 중에 위엄이 있는 나무라면 소나무 중에 적송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나무 숲을 지나며 사색에 젖습니다. 그렇게 바람 바람 찬바람 부는 능선을 따라 오르노라면 고개라 이름지어진 곳에 이르면 사정 없이 가파른 내리막입니다. 내리막이라고 반가울 리 없습니다. 정상에 오르지 않은 한 내려간 만큼 다시 오르게 미련이니까요. 그 내리막 쯤에 낙엽송 울창한 숲을 만납니다. 경쾌하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하늘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일렁거리는 낙엽송 가지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멋진 풍경을 연출합니다. 그러니까 걷다가 때로는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새로운 풍경, 멋진 풍경을 잡아낼 수 있다니까요.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마음에도 담아둡니다. 

 

 

 

울창한 숲이라 조망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우직한 사람들처럼 그냥 오르막만 이어지는 저 끝에 드디어 좀 험한 산악지대를 지나면 그 위에 공작산 비석이 있습니다. 887.4미터, 나 살던 뒷산보다 좀 낮습니다. 나 살던 백우산은 높아도 300명산에 들지만, 공작산은 100대 명산에 든다니 뭔가 다른 게 있을 겁니다. 아마도 수타계곡을 품고 있다, 게서 바라보면 날개를 펴고 다소곳이 앉은 공작을 닮았다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정상에 오르고 봐도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까치 발자국처럼 보이는 새 발자국들만 비석 앞을 수놓고 있습니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역시 강원도다 싶게 산들이 참 많습니다. 뒤편으로만 산들 사이 사이 사람들의 집이 몇 채 보인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산은 안공작재, 수리봉, 약수봉쪽으로 잡습니다. 약수봉을 앞에 둔 맛바위골삼거리에서 임도를 따라 굴운리로 하산합니다. 하산을 시작하면서는 급경사지역이 제법 나타납니다. 특징이 있다면 바닥에 온통 가랑잎이 많이 쌓여서 좀 위험합니다. 바닥하고 가랑잎들하고 따로 놀아서 미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곳엔 서울에 눈이 많이 온 전날에 눈은 오지 않았으나 그 전에 내려서 녹지 않은 눈들이 푹푹 빠집니다. 600고지 아래엔 눈이 적으나 그 위로는 눈이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한두 사람 지난 듯한 길을 따라 걷습니다. 가끔 높이 매달린 겨우살이와 눈맞춤하며, 깨어질 듯 파란 하늘을 감상합니다. 사람들 오르내린 흔적이 별로 없는 명산을 이렇게 호젓하게 걷습니다. 한참을 그리 걷도록 고도는 거의 낮아지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거립니다.

 

 

 

그렇게 지붕 위를 걷는듯 걷다가 지붕 아래로 내려오듯 급경사를 사정 없이 내려올라치면 앞에 우뚝솟은 봉우리 약수봉을 만납니다. 그 봉우리에 넘던 해가 걸립니다. 해 걸린 봉우리에 올라 해를 잡을  욕심 부리지 말고 임도를 따라 굴운리로 하산합니다. 약수봉 정상 400미터를 앞에 두고 그냥 하산합니다. 저리 넘으면 수타사로 하산합니다.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해 임도를 따라 걷습니다. 길가에 늘어선 자작나무들이 부동자세로 나를 맞습니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의장대 사열을 받는 대통령보다 자작나무들의 사역을 받는 내가 훨씬 행복한 거 아니겠어요.

 

 

 

다양한 강의를 하는 덕분에 이렇게 고향의 명산 하나 올랐다가 내려갑니다. 공작처럼 우아하게 공작산에 올랐다 하산하는 내 인생이 고맙습니다. 잡상인 내 인생 말입니다. 특별히 잘하는 재주는 없으나 잡다한 팔 거리를 갖추었으나 아기자기한 삶, 화려하지 않으나 소박한 삶, 요란하지 않으나 고요한 삶, 진하지 않으나 은은한 삶을 살 수 있으니, 한 마디로 퉁쳐서 작고 소박하지만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선언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잖아요. 나는 그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다니까요. 나는 지금의 나, 지금의 나의 삶이 참 좋습니다. 공작처러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부러워하지 말라니까요. 오늘도 대견한 나를 내가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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