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길이 길을 낳는 지리산 종주 산행

영광도서 0 1,766

길은 길을 낳고 시간은 시간을 먹습니다. 사람은 낳은 길을 먹으며 시간을 걷습니다. 길과 시간 그리고 사람, 걷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길이라는 공간과 지나온 길의 거리를 늘려주는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몇시쯤 되었을까, 스마트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고면서 아직은 길을 재촉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어둠의 두께로 시간이 흘렀다 치면서 지나온 길을 슬쩍 돌아보면서 길을 걷습니다. 뒤를 돌아보기, 혼자 걷다보면 누군가 뒤를, 아니 무엇인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은 썩 기분 좋지 않은 느낌 같은 것이 있거든요. 그럴 때면 한 번씩 가끔 뒤를 돌아봅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 속을 혼자 걸으면 평소에 잊고 있던, 아니면 평소에는 간절하게 부른 적 없던 신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믿고 부르게 되거든요. 그럴 때면 짐짓 신과의 관계를 보다 돈독하게 하기 위해 산에 온다, 그런 구실을 대어도 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혼자 길을 걸으면, 더구나 어둠 속에, 더구나 깊은 산길을 혼자 걸으면 평소에 못한 생각들이 불거지는 피부염처럼 툭툭 튀어나옵니다. 밤길에 익숙해진 탓이랄까 화개재를 지나면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내 온몸 구석구석에서 새어나옵니다. 화개제를 오르기 시작하여 1키로미터쯤 올랐을까 달빛으로 밝았던 밤이 갑자기 어둡습니다. 낮에서 밤으로, 밤에서 낮으로 흐르는 게 정상이라면,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가면서 밝아야 할 텐데 어두워집니다. 버티던 달이 서산 넘어로 넘어간 때문입니다.

 

 

 

노고단을 넘어선 이후 사람 구경을 못했는데 반가운 불빛 하나, 연하천 쪽에서 오는 산객 한 분과 마주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반가운 건 지리산 새벽산행에선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다시 혼자 걷습니다. 사람을 마주 보내고 나니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길가를 서성거렸을 멧돼지가 있다 해도 이제는 길을 비켜섰을 거라는 괜찮은 믿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덕분입니다. 랜턴 불빛으로 숲 그림자를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길을 걷습니다. 이렇게 어둠이 다하면 곧 밝음이 올 거란 걸 알기에 적이 안심한 마음, 입에서는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무슨 노래냐고요. 아리라앙 아리라앙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아. 가다가 지치면 쉬어나 가아지....

 

 

 

토끼봉을 그렇게 통과합니다. 오르막을 지나면 가파란 숨을 다독이고는 호흡을 정리합니다. 그쯤에서 해맞이를 생각합니다. 작년에 종주할 때는 연하천을 조금 지나서 해돋이를 봤으나 이번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출발이 그만큼 늦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일곱시 반이 지나면서 먼하늘이 발갛게, 수줍은 새악시의 볼보다 더 붉게 물든 동쪽 하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연하천 대피소 1.5키로쯤 남기고 해돋이를 맞이합니다. 오르던 길을 마저 오르지 못하고 능선을 벗어나 동쪽 벼랑으로 달려갑니다. 길을 벗어나니 눈이 무릎에 차오릅니다. 동으로 열린 거대한 바위에 올라서서 해를 맞이합니다. 온 세상을 삼킬 듯이 붉게 타오르는 태양, 새해 들어 처음으로 맞는 해돋이입니다. 불덩이 같은 뜨거운 태양, 저 태양처럼 올 한도 뜨겁게 살아야지 속으로 삼키며 싱긋 웃습니다.

 

 

 

아름다운 지라산 해돋이를 보고 다시 가던 길를 재촉합니다. 나올 듯이 나올 듯이 나오지 않는 연하천 대피소,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건 조금은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반증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밝습니다. 이쯤엔 걷기가 지루합니다. 힘이 듭니다. 벌써 힘이 들면 곤란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체력 때문이 아닙니다. 걷다가 깜짝깜짝 놀라기 때문입니다. 왜내고요. 졸리거든요. 차 안에서 제대로 잠을 못 자니 아무리 겨울이라도 졸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 겨울에 산에서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잠이 쫓겨가기를 바라면서 사탕을 입에 물어도, 노래를 읊조려도 마음 속에서 잠좀 자자 잠 좀 자자 발걸음을 무디게 만듭니다. 조금은 휘청거리며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전산으로 표기되는 온도는 영하 10도, 걷느라 추위를 생각 못했는데 춥긴 추운가 봅니다.

 

 

연하천 대피소에 공간이 있다면 슬쩍 들어가 잠이라도 잤으면 싶다만 용기가 없어 그냥 길을 걷습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까지는 3.6키로미터, 이 코스가 가장 쉽습니다. 반대쪽에서 오면 오르막이라 어렵겠지만, 이쪽에서는 주로 내리막으로 이어져서 편한 편입니다.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다행히도 긴장을 좀 더 해야하니까 졸음이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계속 내리막만 있는 게 아니라 오르막도 당연히 있습니다. 힘은 내자 힘을 내자 내가 나를 달래면서 드디어 벽소령에 도착합니다.  벽소령 도착 9:10분, 그런 대로 빨리 걸은 셈입니다. 잠시 쉬면서 아침을 해결합니다.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벽소령 대피소 뒤편, 나무 상에 자리를 잡고 넉넉한 마음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지리산 종주를 인생에 빗댄다면 이제는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을 맞은 정도입니다. 총 37키로미터, 남은 거리는 절반이 채 안 남았으니까요. 이제부터 보다 진중한 마음으로, 진중한 걸음으로, 조금은 무거운 걸음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이미 한참을 시작한 하루지만,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 하루를 다짐합니다.  다짐과 함께 하루의 일과의 순조로움을 기원합니다. 너무 힘들지 않기를, 가능하다면 즐겁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기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고 염원하듯, 하루만의 삶에 기원을 심습니다.

 

 

 

지리산 종주, 인생을 고스란히 닮았다 싶습니다. 다시 길을 나섭니다. 정상이 보다 가까운 세석평전을 향하여 앞으로 펼쳐진 길을 사뿐싸뿐 걷습니다. 많이 걸었으나 다시 이어지는 길, 걷고 걷는 한 길은 길을 낳고, 그 길에 시간이 얹힙니다. 그것을 나는 다는 기억할 수 없으나 기억합니다. 적어도 통과시간이거나 인상적인 풍경을. 그 중에서 의미를 부여하여 추억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내일 다시 길을 잇습니다. 내일 갈 길을 상상해 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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