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무등산 산행, 자아성찰의 시간
생각을 하며 생각합니다. 생각이 생각을 낳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과 생각이 인과관계로 이어지나 하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의 흐름이 바뀌기도 합니다. 점잖게 표현하면 아주 다양한 생각을 합니다. 흔한 말로 표현하면 잡다한 생각을 합니다. 즉 잡념도 있지만 쓸만한 생각도 많습니다. 때로는 철학에 버금가는 생각이 나의 의식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럴 땐 뿌듯한 미소를 흐뭇이 흘립니다. 때로는 평소에 풀리지 않던 문제들의 해답도 슬며시 나옵니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 건, 생각에서 생각을 잇는 건 그래서 좋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그래서 좋습니다. 걷든 뛰든 앉아 있든 서 있든 혼자 있는 시간엔 생각이 생각을 낳습니다. 내가 나에게 말을 겁니다. 아무런 방해 없이 내가 나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나름 해답이 고개를 내밉니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나에게 답합니다.
생눈을 뚫으며 걷지만 힘들기보다 좋습니다. 외롭다거나 고독하기보다 보람이 있습니다. 자아성찰하는 좋은 시간, 막혀 있던 문제를 푸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랑산 내리막이 끝나는 즈음, 오르막의 시작은 곧 매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매봉으로 오르는 길 역시 작은 오르락 작은 내리락을 반복하는 아기자기한가 하면, 오솔길처럼 평안하게 걸을 수 있는 호젓한 길로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아주 수월한 건 아닙니다. 생눈을 뚫고 가야 해서 힘이 듭니다. 오르막에선 숨이 찹니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하얀 눈을 더 하얗게 만들어주는 깨질듯 파란 하늘, 나무에 핀 눈꽃들을 만나 어우러진 파란 하늘, 아주 잘 조합을 이룬 고운 풍경이 마음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그러면 힘들다는 생각은 어느새 무화되고 없습니다.
언덕에 올라서면서 숨이 가빠오면 멀리 무등산 정상을 바라봅니다. 무등산 정상이 평온한 모습으로, 낙원의 모습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하얀 왕국, 상고대로 이룬 왕국이 저기 있겠다 싶으면 벌써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저 하얀 왕국의 부름, 길은 아직 멀건만 마음은 벌써 상고대로 이룬 눈꽃 세상에 가 있습니다. 상고대와 눈꽃이 다르다만, 만일 저 정상에 상고대가 없다 한들 '오늘 충분히 누릴 건 누렸다' 싶어 마음 뿌듯합니다. 눈꽃세상, 많이도 내린 눈, 드물게 보는 풍경입니다. 걷는 만큼 하얀 눈길은 뒤로 길게 남습니다. 여전히 앞에는 하얀 세마포를 펼쳐 놓은 것처럼 끝없는 하얀 세상이 길을 내라고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눈길이,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향해 다가옵니다. 내가 가는 건지, 풍경이 내게 오는 건지, 가끔 아름다운 착각을 할 만큼 아름다운 날입니다.
길을 만들며 간다는 것도 가끔 잊습니다. 마치 선구자 마냥 하얀 길, 아무도 가지 않은 하얀 길을 걷는다 생각하니 기분이 더 없이 좋습니다. 서서히 체력이 빠져나갈 테지만, 지리산도 하룻길에 걸었다는 자신감을 부추기며 힘내자 하며, 걱정하지 말자며 걷고 걷습니다.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멋진 봉우리 하나, 마집봉인가 했는데 예상 못한 봉우리입니다. 지도에서 못 본 봉우리입니다. 소태역에서 출발해서 세번째 만나는 봉우리, 탑봉입니다. 하얀 눈에 덮인 탑들이 앙증맞은 인형들처럼 히죽히즉 웃으며 서 있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무등산 정상 부근, 그리고 장불재의 하얀 능선의 고운 풍경, 바라볼수록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습니다. 하얀 능선이 저리도 곱습니다.
탑봉을 내려갑니다. 철계단 가득 눈이 덮여 발 내딛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하얀 계단,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내딛습니다. 눈이 모든 것을, 어쩌면 모든 장애물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냥 부드러운 하얀 길 같지만, 장애물이 안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아주 하얀 계단, 푹신푹신해 보이는 흰 계단을 내려와 돌아봅니다. 나 한 사람의 걸음일 뿐인데 길이 아주 뚜렷하게 나 있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내리막 길을 주욱 내려갑니다. 올라가면 그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갑니다. 그러면 다시 그 이상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앞에는 저만치 우뚝솟은 능선, 파란하늘을 이고 선 능선이 매혹적으로 손짓합니다. 거기 오르면 다시 봉우리 하나 만나겠지요.
아직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증심사에서 오르면 만나는 서인봉까지는 혼자 길을 내면서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얼추 올라왔다 싶었는데 어라 사람이 걸어간 흔적입니다. 마집봉으로 오르는 갈래길로 누군가 나보다 앞서 간 겁니다. 흔적을 따라 걸으니 한결 쉽습니다. 러셀작업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3년만에 하는 러셀 인연이니까. 이젠 고생 끝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발자국, 반가운 흔적을 따라 오르니, 드디어 마집봉입니다. 마집봉에서 길이 갈립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과 하산길입니다. 누군가는 이리 하산했나 싶고, 서인봉에서 왔을지도 모를 발자국은 정상으로 나 있습니다. 이제 마음 놓고 걸을 수 있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서인봉쪽 발자국을 따라 걷습니다. 한 사람 정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내려가다가 흔적이 끊깁니다. 바람이 눈을 날려 길을 메웠나, 그리 생각하고 한참을 걸었으나 여전히 흔적이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서인봉쪽으로 걸으려다 생눈이라 포기하고 되돌아가서 마집봉에서 하산한 겁니다. 다시 생눈 뚫기, 제법 길고 긴 여정입니다. 조금 걸으니 바윗길입니다. 괜히 조심스럽습니다. 아주 험한 건 아닐지 걱정도 합니다. 사전 정보가 없어, 긴장하며 걸으려니, 자칫 쥐가 날 조짐이 있어 걸음을 조정합니다. 드디어 서인봉에 섭니다. 장장 7키로미터의 러셀작업이 끝납니다. 서인봉에서부터는 길이 훤히 나 있습니다. 지나는 사람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납니다. 풍경이 아름다워서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 풍경에 취해, 눈꽃에 취해 웃음꽃이 핀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가던 길을 갑니다.
사람들의 세상 생각은 줄어듭니다. 길고 길게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혼자의 길, 생각이 생각을 낳는 산행, 나 혼자의 산행이 참 좋았다 싶습니다. 풍경도 풍경이려니와 내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실컷 생각할 수 있었던, 힘들다 싶으면서 생각을 이었던 시간들을 잃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곰씹으며 얻는 진정한 대답, 그것은 내 안에서 나온다는, 내 안에 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조금은 힘들게 길을 걸으며 내 안으로 내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보다 성숙한 마음을 얻습니다. 그걸 난 자아성찰이라고 부릅니다. 그 단어를 떠올리며 다시 길을 걷습니다. 어떤 풍경이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염려라곤 없는 설렘만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방울처럼 살살 배어나옵니다. 좀 더 먼 하늘을, 좀 더 먼 배경을 바라봅니다.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헤매고, 마음은 안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생각을 마구 낳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정상으로 가는 길은 나를 위해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