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바람 찬 날에 더 아름다운 북한산

영광도서 0 1,908

"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란 노랫말처럼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듯이, 산 역시 그런 산이 있습니다. 물론 산이야 다 그렇긴 해도 아무리 자주 가도 질리지 않는 산, 그런 특별한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가리켜 명산이라고 합니다. 비록 가까이 있어 그다지 그리움의 대상인 산은 아니지만, 언제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산, 북한산, 그 산이 나의 뒷산이라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야말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추우나 더우나 잠깐 틈을 내면 다녀올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지난주에 눈이 내린 다음날부터 올겨울 들어 제일 추웠습니다. 이렇게 밤에 눈이 내리고 다음날 아침에 날씨가 좋으면 산이 부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겠다고. 영하 16도라니 좀 망ㅅ러여지기도 했지만 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멀고 높은 산에 가도 좋겠지만, 새벽에 집을 나서는 게 부담스러워 가까운 북한산으로 향했습니다. 해돋이를 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대략 마음속으로 산행 지도를 진달래능선에서 시작하여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 백운대, 하루재, 영봉을 거쳐 육모정으로 하산하겠다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정도면 아름다운 날의 북한산 셜경을 고루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고 우이동에 내리니 일곱시가 채 안 되었습니다. 이때쯤이면 날이 훤하게 밝겠지 생각했는데, 아직 그만큼 해가 길어지지 않았습니다. 진달래 능선에 들어서니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아직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눈길이라 어렴풋이 길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랜턴도 가져 오지 않았는데 어두웠습니다. 자주 다닌 길이라 어림잡아 걸으려니 다른 건 무섭지 않은데 멧돼지가 나타날까 그게  좀 겁이 났습니다. 눈이 제법 덮여 눈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 그리고 어슴푸레한 어두움, 당장 나타날 것 같은 멧돼지, 용기를 내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습니다.

 

 

 

진달래 능선에 들어서서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서면 거기서부터 진달래능선입니다. 비슬산이나 고려산 진달래는 촘촘하게 자리 잡아 진달래꽃들이 흐드러지게 핀다면, 진달래능선의 진달래들은 크기가 각기 다르고 여기 저기 산재한 채로, 색깔도 아주 다양하게 능선길을 따라 피어서 보다 자연스럽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달래능선이란 이름을 얻은 능선길로 올라섭니다. 북한산 등산코스 중 비교적 완만하고 다니기 편한 코스입니다. 하여 평소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인데, 새벽인데다 날씨가 추우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평일이니 말입니다.

 

 

 

가끔 펄럭이는 내 옷자락 소리에 놀라며 걷습니다. 오래 걷지 않아 진달래능선 중간쯤 멀리서 먼동이 틉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무도 겆지 않은 생눈을 밟아야 합니다. 날씨가 춥다니까 어르신들이 산행을 나서지 않았나 봅니다. 뒤돌아 동쪽 하늘을 보니 발그랗게 노을이 먼산을 물들입니다. 해돋이를 볼 양이면 오르다 전망 좋은 곳에 멈추어서 기다려야 할 테지만 그냥 걷는 대로 걷다가 해돋이를 맞을 양으로 그냥 걷습니다. 발 아래 길은 눈길에다 침침한데 좌측으로 멀리 보니 북한산 정상의 모습들은 먼 빛을 받아선지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어 아름답습니다. 눈으로 풍경을 담으며 그냥 걷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붉음이 새들어옵니다. 오늘 따라 유난히 해가 붉게 타오르는 듯합니다. 마치 산에 불이라도 난 듯이 온통 빨갛습니다. 그렇게 나뭇가지들 사이로 해돋이를 구경하다 보니 대동문에 도착합니다. 대동문이 아직 발그레한 햇빛을 받아 평소와 달리 홍조를 띄어 아름답습니다. 완전한 밝음 속에 세상이 뚜렷이 보입니다. 재작년에 여기서 이런 날에 무척 아름다운 상고대를 보았으나 눈꽃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림자 진 대동문 안에서 통행로를 보니 빛이 문그림자를 그려내어 묘한 운치로 아름다은 그림 하나 그려줍니다.

 

 

 

아직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혼자 걷습니다. 발자국이라곤 고라니의 흔적으로 보이는 발자국, 분명히 알 수 있는 토끼 그리고 족제비 발자국, 여기에 보태어 쥐발자국만 보입니다. 그러다 금방 지니간 것으로 보이는 멧돼지들이 행패를 부린 흔적만 있을 뿐.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동문에서 북한산 대피소로 가는 길은 눈은 가득하나 운치가 그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길을 걸으면서는 진달래 피었을 때의 아름다운 길, 녹색 덮였을 때의 공원길 같은 여름길, 단풍 곱게 어우러진 가을길을 상상하며 겨울길을 걷습니다. 대동문을 지나 오래지 않아 동장대를 만나고, 좀 더 걸으면 대피소, 그 다음이 용암문입니다.

 

용암문을 지나 노적봉을 지나면 상고대가 잘 피는 곳인데 여전히 눈꽃만 가득이지 상고대는 없고, 추위를 조심하라는 듯 인정사전 없는 찬바람만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겁나게 위협합니다. 귀를 싸매고 걸으니 그닥 추위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산에 들면 신기하게도 덜 춥습니다. 다운 자켓을 챙겨는 왔으나 입지 않아도 그닥 춥지 않습니다. 마치 엄마의 품처럼 산은 이렇게 사람을 감까 안아주나 봅니다. 생눈이라 조심스럽게 길을 내며 걷다 보니 벌써 백운대 아래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런 대로 길이 나 있습니다. 송추쪽에서 딱 한 사람이 올라간 흔적이 있습니다. 여기부터는 생눈이 아닙니다.

 

 

백운대 정상에서 상고대를 만났습니다. 바람은 아주 드세었습니다.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가 아주 팽팽하게 펼쳐져서 다시 접히지 않을 만큼 바람에 부풀었습니다. 사방으로 산들이 아름다운 선을 드러내며 겨울 풍경을 만끽하게 합니다. 그만큼 시야를 확 열어줍니다. 도봉산은 물론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등, 서울을 둘러싼 모든 산들이 오늘은 내 눈에 가깝습니다. 추위 덕분에 황사 대신 맑은 대기를 만끽하게 하고 파란 하늘을 펼쳐 보여줍니다. 백운대 정상 부근엔 역시 상고대가 피기 시작하여 무척 아름답습니다. 하늘이 쩍 하고 갈라질 정도로 동해바다 만큼이나 아주 파랗습니다. 이런 날엔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상고대까지 파란 배경을 삼아 보여주니 산행보너스라도 받은 듯 기분이 확 상승됩니다.

 

 

 

그럼에도 배는 고프니 바람이 덜 심한 곳에 선 채로 군고구마 하나 껍질을 대략 벗겨 먹는 것으로 아침을 대신합니다. 찬물 대신 따뜻한 물을 마시며 목메인 불편을 없애는 것으로 아침을 대신합니다. 하산을 하면서 하루재에서 영봉으로 오릅니다. 바람에서 비껴난 곳의 나뭇가지들엔 눈꽃이 고스란히 곱게 피어 있습니다. 영봉, 인수봉을 오르다 죽은 이들의 위패를 많이 모셨던 곳이라 붙은 이름 영봉, 지금은 흔적은 없으나 많은 산악인들의 추억을 안고 있는 봉우리,  인수봉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영봉에 올라야 합니다. 영봉에서 바라보는 인수봉은 때에 따라 게절에 따라 항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무척이나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영봉에서 인수봉의 설경을 감상하고, 육모정으로 향하여 걷습니다. 바람이 드세게 분 때문에 길이 온전히 나 있지 않습니다. 한두 사람이 지난 자국이 있으나 바람이 몰아다 놓은 눈이 무릎까지 차오를 정도로 쌓여 있거나 지나간 발자국을 지워버린 곳도 많아서 생눈이나 다름 없습니다. 여전히 하늘은 파랗게 곱고, 시야는 확 트여 먼 산까지 아주 잘 보입니다. 육모정을 지나 하산하는 길엔 탐스러운 눈꽃들이 너무 멋집니다. 특히 소나무에 쌓인 눈들이 눈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풍경이 아름다워 추위를 잊게 한 북한산 산행, 늘 같은 산이지만 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북한산을 나섭니다.

 

 

 

언제 찾아도 좋은 산, 언제나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거리를 조정하기 좋은 여러 등산로를 가진 산, 가까이 있어 자주 찾을 수 있어 좋은 산, 북한산을 나섭니다. 산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늘 그대로 좋은 북한산, 일상에서도 이런 북한산을 닮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산다면 참 좋겠다 그 생각으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들, 산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도 그런 사람들 얼마든 있으니까 세상 살맛 나는 것 아니겠어요. 산도 아름답고 세상도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북한산처럼 당신 역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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