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담양의 추월산과 용불용설
용불용설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생물이 주로 사용하는 눈이나 손 그리고 발과 같은 주요기관은 쓰면 쓸수록 진화되어 왔는데 비해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이론입니다. 그 예로 기린의 조상은 원래 목이 짧았으나 높은 곳의 나뭇잎을 따먹으며 생활하면서 목이 길어졌다는 주장입니다. 즉 쓸수록 진화하고, 안 쓰면 퇴화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을 산행을 하면서 느낍니다. 나 역시 한때는 채력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결핵으로 죽음 직전에 갔다 온 후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야산 1키로미터를 오르는 데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때부터 등산은 나의 필수적인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 난이도의 산행이라면 부지런히 걸으면 10분이면 가능합니다.
그때 이후 습관으로 산행을 하면서 나는 예찬론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산에 오릅니다. 기왕이면 안 가 본 산에 갈 수 있다면 더 가려 애를 씁니다. 오늘 소개하는 산은 지난해 연말 무렵 담양에 그리스신화 강의를 간 길에 들린 추월산입니다. 어차피 저녁 강의라 끝나면 밤 아홉시가 넘는지라 하룻밤을 거기서 자고 아침 일찍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강의를 담당한 이에게 담양 지역에 산 중 좋은 산을 추천해 달라니 즉시에 추월산을 추천합니다. 추월산, 이름 그대로 가을에 달밤이 유난히 아름다운 산이란 겁니다. 가을이면 보름달이 산에 닿을 것같이 드높은 산이라는 겁니다.
자료를 찾아 조금 소개를 한다면 호남의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추월산 암봉이 특히 유명하답니다. 가을뿐만 아니라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기도 하며,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여름에는 울창한 녹음과 시원한 담양호반의 푸른 물결, 겨울이면 설경과 암벽에 매달린 고드름이 매우 인상 깊다고 소개합니다. 정상에서 특히 조망이 뛰어나서, 남쪽으로 담양호와 무등산, 동쪽으로 고리봉, 동북쪽으로 백운산, 북서쪽으로 내장산과 입암산, 서쪽으로 방장산, 서남쪽으로는 병풍산과 태청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답니다. 보리암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담양호, 건너편으로 강천산의 산줄기와 금성산성을 볼 수 있답니다.
추월산, 이 산이 100대명산에 든다는 걸 몰랐습니다. 새벽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내가 추월산에 간다니 전주에 사는 친구가 새벽에 차를 몰고 숙소 앞까지 왔습니다. 그의 차로 추월산으로 이동 새벽에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새벽산행이라야 여섯 시니까 여름 같으면 새벽도 아니긴 합니다. 어둠 속에 오르며 하늘을 보니 하늘에 별들이 해맑게 곱습니다. 으례히 밤에 산에 오를라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습관입니다. 하늘을 보면 별들 고운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이른 산행이 주는 멋진 선물입니다. 발 아래서는 다져진 눈들이 밟히는 소리가 바스락거립니다. 처음엔 추웠으나 조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드디어 좁은 등산로로 접어들어 조금 오르다 보면 삼거리입니다. 직진하면 보리암이요, 좌측으로 가면 보리암을 우회하는 길입니다. 바람바람 오르며 멋진 일출을 보리라 기대를 합니다. 하늘엔 붉은 해가 솟고, 그 해를 유혹한 담양호에서 또 다른 해가 불쑥 솟아오를 그림을 상상합니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친구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새벽을 달래며 오르노라니 벌써 여명이 다가옵니다. 하늘의 별들도 점차 영롱함을 잃고 색이 바래지며 점차 희미하게 하늘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별들도 하나 둘 사라집니다. 아침이 옵니다. 여지 없이 소슬바람이 입니다. 겨울에 비해 그리 차지 않은 바람입니다.
별들이 사라진 하늘, 언젠가부터 잔뜩 흐린 것 같습니다. 해돋이는 없다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걷다 보니 거대한 바위더미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 유명한 보리암인가 합니다. 아직 완전히 밝은 건 아닌데 우아하기도 하고 거대한 바위가 무척이나 경이롭습니다. 올려다보니 곧바로 올라가면 바로 정상일 듯 싶은데, 안내 이정표엔 보리암 정상까지 800미터입니다. 보기엔 정상이 바로 위인데, 800미터라 의아합니다. 거대한 바윗덩이를 싸고 돕니다. 바위, 바위, 거대한 성벽처럼 둘러친 거대한 바위벽을 빙 돌아 걷고 걷습니다. 바라볼수록 경이롭습니다. 100대 명산이 아니라 10대명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겟다 싶습니다. 1키로미터 가까이 돌아야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암봉입니다.
어둠 속에 봐도 멋진데 밝은 날에 보면 더 좋겠다 싶어 돌아올 때는 온 길로, 제2등산로로 오리라 기약합니다. 해돋이를 보려 했으나 새벽엔 분명 하늘이 맑아 별이 가득하더니 그 사이에 하늘이 변덕을 부려 해돋이 보기는 영 글렀습니다. 시야도 그리 맑지 않습니다. 해돋이를 맞는 작은 설렘과 자그마한 긴장, 그랬는데 그렇게 맑던 하늘이 언제 두터운 구름인지 황사인지에 싸여 하늘을 불그스럼하게 물들이다 말아 작은 기대는 깨어진 대신 멋진 보리암의 풍경이 그 마음을 달래고도 남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둡하며 오르다가 멎고 오르다가 멎습니다. 풍경이 그만큼 가끔 발걸음을 묶습니다. 왜 추월산이 명산인지 알겠다 싶습니다.
보리암 정상을 지나 추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합니다. 추월산은 높이 731미터로 보리암보다 높긴 하지만 사방을 조망하는 데는 보리암이 훨씬 좋습니다. 추월산 정상에서 친구와 함께 준비해간 음식으로 대략 요기를 합니다. 겨울이라지만 눈은 드문드문 그늘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호수에서 올라오는 습기 덕분인지 자세히 보면 정상에 날카로운 바위들에 상고대가 제법 곱게 피었습니다. 그걸 감상하며 아침을 해결하고 일어나 주변 풍경을 봅니다.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니 경치가 상상이 갑니다. 앞쪽에도 호수 뒤쪽에도 호수입니다. 호수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솟아오른 낮은 산봉우리들이 참 운치가 있습니다. 제대로 맑은 날이면, 호수 넘실거리겠다, 산봉우리들 운치 있겠다, 그야말로 동양화 같겠다 싶습니다.
눈으로 즐겁게 풍경을 담고, 날씨 좋은 날에 펼쳐질 풍경을 상상하며 마음에 담습니다. 근사한 풍경을 상상하며 그 풍경을 여럿 간직합니다. 언젠가 기회 만들어 다시 이대로 올라 저 아래 풍경을 봐야겠다 그 생각을 합니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갑니다. 하산 길이 따로 있다면 다른 산에서는 다른 길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나의 지론인데, 올라온 길의 인상이 너무 깊어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올라온 길로 다시 내려갑니다. 밝은 날에 보니 올라올 때 못 본 바위 동굴에서 우뚝우뚝 자란 고드름도 봅니다. 다시 봐도 멋진 산, 멋진 바위산입니다. 이름의 유혹에 끌려 그 산에 가지만 막상 가고 나면 한 번 보는 것으로 족한 산도 많은데, 추월산은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오고 싶은 산입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산입니다.
왕복 7키로도 안 될 듯, 그리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산이라서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산입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담양호에서 솟는 멋진 해돋이를 볼 수는 없었으나 그 아름다움을 상상으로 충분히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산객 한 사람도 못 만나고, 주차장에 내려오니 그제야 산행을 시작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담양에 강의하러 온 길에 추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이 또한 축복 받은 삶이로다, 그 생각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움을 예감합니다.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언제든 산에 갈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만들어 틈틈히 산을 즐긴 세월, 용불용설의 덕분에 이젠 산에 오르는 건 전혀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이 나를 건강하게 도와줍니다.
헉헉대던 호흡이 고른 호흡으로 내가 느끼기에도 기분 좋은 호흡이요. 둔탁한 걸음이 변해 가벼운 걸음, 과장하면 새털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산에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더란 말인가요. 저질 체력이라 늘 소화불량으로 시달리고, 감기로 시달리고, 추위엔 꼼짝 못하던 내가 겨울산을 오히려 즐기게 되었으니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나는 신봉합니다. 나는 내가 진화시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진화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무언가 공부를 할 것이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겁니다. 나의 서서히 멋진 진화, 살아 있는 한 나는 그 진화의 중심에서 살아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