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북한산 산행에서 만난 머언 먼 어머니
일상에서 벗어남, 그것을 일탈이라고는 할 수 없고,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런 날이고나 할까요? 해마다 설날이면 습관처럼 가곤 하던 춘천엘 올해는 가지 않으려니 뭔가 허전하달지, 쓸쓸하달지, 어색하달지, 국적 불명의 말로 맨붕이랄지, 그렇게 설 명절을 보냈습니다. 할 일이 많으나 그렇다고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때로는 멍하니 동계올림픽 중계를 시청하면서 보내거나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원고 저 원고 정리한답시고 내가 쓴 글을 읽거나, 고전읽기 강의를 위한 책을 다시 펼쳐 읽거나 그렇게 보내는 걸로 마음 다잡기로 조용한 나만의 명절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딱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술이나 좋아한다면 술에 빠져 보내거나 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이럴 때면 가장 좋은 것이 산에 오르는 일입니다. 산은 어머니처럼 언제든 찾아가기만 하면 아무런 거부반응이 없이 나를 받아들여줍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산에만 들면 이상하게 춥지 않습니다. 이유인즉 산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 이상의 머언 먼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랄까,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휠씬 이전의 최초의 신 자체랄까, 하여 어머니처럼 품어주어서 그런가 싶습니다. 남들은 고향에 있거나 또는 귀향중이거나 할 명절 연휴에 북한산에 다녀왔습니다.
산에 갈 바엔 이른 아침에 가는 게 좋습니다. 풍경이란 게 늘 같은 모습인 것 같지만, 빛에 지배를 받기에 아침 햇살을 받는 풍경은 아주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아침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침 햇살을 받은 하늘색은 유닌히 곱습니다. 그 맛을 알기에 산에 갈 양이면 이른 아침에 해돋이를 볼 겸 그렇게 이른 산행을 합니다. 북한산에 오를 작정이면 아침에 집 앞에서 1144번 버스를 탑니다. 이 차는 북한산 입구인 우이동을 지나갑니다. 이 차의 차고지가 하계동인지라 집에서 가장 이른 아침에 탈 수 있습니다. 첫 차를 타면 무난히 북한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봄으로 접어들면 해돋이가 빨라져서 힘들지만 2월까지는 가능합니다.
군고구마 챙겨서 첫 차를 탑니다. 우이역에 내리니 아직 어둡습니다. 이렇게 새벽이면 산으로 들어가기 망설여집니다. 무엇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딱 멧돼지 한 종류가 무섭습니다. 그놈들을 만나면 대책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신작로를 따라 걷습니다. 신작로로 도선사주차장까지는 가능하니까요. 아직 차량통행도 거의 없습니다. 도시의 불빛으로, 그렇게 어둡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반짝거립니다. 기상대 예보로는 그다지 춥지 않아야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 체감온도를 낮춘 때문에 조금은 으슬으슬합니다. 그 덕분에 하늘의 별은 더 맑고 영롱하고요. 해맑은 별들을 보니 서울 하늘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별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생경스럽습니다.
도선사로 오르는 신작로, 이전에는 산이었을 길입니다. 신작로라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깔딱고개처럼 빨리 걸으면 제법 숨이 차오릅니다. 도선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여섯시 반, 대략 백운대까지 오십 분의 여유가 있습니다. 도선사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2키로 남짓하니 천천히 걸어도 충분합니다. 아직은 좀 어둡습니다. 혹시나 지니고 다니던 전철에서 파는 1000원짜리 미니랜턴을 꺼내서 비추어 보니 그런 대로 쓸만합니다. 혹 멧돼지 만날까 겁이 좀 나서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쿵쿵 찍으며 걷습니다.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걸으려니, 게다가 새벽이라 천천히 걸어도 걸음이 빨라지는 듯합니다 . 지리산에 가도 마찬가지로 멧돼지나 곰이 겁나지 다른 건 겁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지리산엔 곰은 겨울잠 자니까 상관 없고 멧돼지 그놈만 조심하면 됩니다.
하루재가 가까워지면서는 이제 멧돼지는 안 나타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뒤돌아보면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 거립니다. 하루재를 넘어서면서는 바닥이 온통 빙판입니다. 조심조심 걷습니다. 산악구조대를 지나면서는 오르막이라 미끄럽긴 하지만 덜 위험합니다. 백운산장 가까이 오면서는 이미 먼동이 터서 걷기 딱 좋습니다. 멀리 아침 노을이 아주 고운 걸 보니 오늘은 해돋이가 볼만 하겠다 싶습니다. 아직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나 혼자일까, 그렇게 백운동암문을 지나 조금 오르다 드디어 한 사람을 만납니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걸로 보아 사진작가인가 싶습니다. 정상에 안 오를 건지 물으니,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같다면서 추워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거랍니다.
먼동이 터오던 하늘, 이미 날은 밝을 대로 밝았고, 동쪽하늘은 이미 바알간 빛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위대한 태양왕의 귀환이랄까 탄생이랄까를 기다립니다. 가끔 뒤돌아 해돋이를 예감하면서 정상에 오릅니다. 아직 해돋이를 조금은 기다려야 합니다. 태극기가 찢어질 듯 휘날리는 정상은 너무 바람이 차가워서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넓직한 운동장 바위, 그쯤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명당자리를 혼자 차지합니다. 땀을 별로 흘리지 않은 덕분에 바람만 피하니 그다지 춥지는 않습니다. 기온은 내려가서 추운 날씨다만 바람 없는 곳에 서면 견딜만 합니다. 하늘이 하늘이, 동쪽하늘이, 그 하늘 중에서 한 곳이 유난스레 붉어지면서 보내는 아름다운 신호, 저리로 발간 해가 떠오를 겁니다.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눈은 한 곳에 집중합니다. 황홀하달까 환상적이랄까, 여기 딱 맞는 표현을 못 찾겠으나 아름다운 탄생의 순간입니다. 빼껌하게 아주 멋진, 아주 아름다운 몸을 살짝 보여주는가 싶더니, 너무 아름다운 동그란 알을 하늘이 탄생시킵니다. 위대한 하늘신의 자궁에서 아주 아름다운 한 생명이 슬그머니 빠져나옵니다. 마치 웅장한 고전 명곡이 울려퍼질 듯 싶습니다. 혼자지만 와아 함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정망 아름다운 해돋이입니다. 카메라만 좋으면 아주 멋진 작품이 나올 듯한데, 이럴 땐 좋은 카메라가 있었으면 싶습니다. 이른 아침 잠을 달래고 나선 해돋이 산행, 충분한 보상을 받은 듯 합니다. 해돋이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앞에 보이는 인수봉도 붉은 햇빛을 받아 마치 황금덩어리 같습니다.
추위에 달달거리던, 조금은 떨리던 몸도 저토록 아름다운 해님의 탄생 앞에서는 스스로 고통을 치유합니다. 고통을 잊습니다. 아린 손끝도 마다 않고 폰의 셔터를 누릅니다. 아쉬운 대로 해가 내 폰 안에 갇힙니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잡아 세웁니다. 멈추게 합니다. 살아 움직이지는 않으나 그 순간은 그대로 잡혀서 기록으로 남습니다. 고여 있는 시간으로 잡힙니다. 살아 있는 그대로 생동감을 주지는 못해도 어느날엔가 다시 이렇게 잡힌 순간을 들여다본다면 이 날의 감정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허전함에 나선 산행, 이 해돋이 장면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싶습니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머언 먼 대지신의 위로로 허전함이든 허망함이든 달래면서 이제 하산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