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소백산 깊은 눈 속에서
해마다 겨울이면 뻬놓지 않고 다녀오는 산이 있습니다. 서울 근교 산들은 물론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무등산 그리고 소백산입니다. 눈 쌓인 이 산들은 다른 산들보다 특별한 매력을 보여줍니다. 이 중 설악산은 남성적인 아름다움, 지리산은 남성미와 여성미의 혼합, 그외 다른 산들은 아주 부드러운 곡선의 여성미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눈쌓인 능선을 바라만 봐도 기분이 상쾌할 만큼 참 고운 산들입니다. 특히 소백산은 유려하면서도 길게 이어진 능선이 아름다움, 정신이 수백 번은 번쩍 들게 할 듯한 세찬 칼바람, 착착 안겨올 듯한 부드러운 길이 마음을 강하게 끌어줍니다. 때문에 한 번 다녀오면 겨울에 설산, 봄에 철쭉 꽃산을 많이 그립게 합니다.
설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코스라면, 희방사역에서 출발하여, 죽령을 거쳐, 제2연화봉, 제1연화봉, 비로봉을 지나 국망봉까지 가서 어디로 하산하든 이 능선을 따라 산행을 즐기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비로봉 정상 언저리에 칼바람이 아주 인상적이지만 참으로 멋진 설경을 보여주는 지역은 2연화봉과 1연화봉 사이를 잇는 길이 그만입니다. 물론 상고대가 제대로 핀 날,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 하늘이 파란 도화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날이면 아주 그만입니다. 특히 다른 곳엔 모두 봄이라고 할 요즘과 같은 시기에 비가 내린 다음 날, 이쯤에는 소백산 정상 능선엔 여지 없이 아름다운 설산입니다. 그 아름다운 기억 때문에 이맘때가 되면 소백산을 늘 그리워합니다.
해마다 혼자 이맘때 소백산에 한 번쯤 다녀오곤 했습니다. 올해도 기회를 노리다 지난 3얼 1일에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랑 함께 갔습니다. 내가 간다고 선언했더니 따라나서겠다고 하여 함께했습니다. 혼자 갈 때는 열차 편으로 죽령에서 이어지는 종주능선 산행을 하는데, 승용차를 이용하니까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으려니까 단양의 어의곡으로 가서 비로봉으로 올라 국망봉을 거쳐 하산하는 코스가 무난하기에 이 코스로 잡았습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 어의곡 주차장에 도착하니 일곱시 반이었습니다. 상당히 여유롭게 산행을 할 수 있는 시간, 오는 내내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은 젖어 있었고, 산행의 설렘을 충족시켜주고도 남을 만큼 주차장 바닥엔 눈이 10센치는 쌓여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설경을 상상하며 비로봉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이들이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글의 흔적은 없고, 오직 하얗게 빈 길만 펼쳐졌습니다. 앞서 간 다섯 분은 우리가 하산하기로 계산한 그 길로 올라간 듯했습니다. 발등에 착착 안길 듯 밟히는 하얀 길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걸었습니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의 양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눈의 무게를 못 이긴 넝쿨식물들이랑 조금은 약한 가지의 나무들이 배밀이를 하거나 허리를 굽힌 듯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지대가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통과하느라 바둥거리며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쯤은 즐거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그런 곳이 많이지니까 좀 번거로웠습니다. 손이 젖고 몸이 젖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풍경은 그야말로 죽여줍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나 할까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를 잔뜩 높인 낙엽송들에 쌓인 눈꽃들, 원시림 같은 장쾌한 풍경이며, 잡목들에 쌓인 눈꽃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 없습니다. 풍경이 아름다움을 더해 갈수록 바닥에 눈의 양은 점차 늘어납니다. 산행에는 친구보다 내가 더 고참인지라, 아직 체력은 내가 더 나은지라 내가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러다 눈의 양이 많아지면서 산행 속도가 느려지는 듯하여 내가 앞장을 섭니다. 눈의 양은 점차 늘어나서, 이를테면 고도가 낮을수록 비가 온 시간이 길었다면, 고도가 높을수록 비가 온 시간이 적었을 것이고, 정상쯤엔 비는 온 적이 없고 밤새대록 눈만 내렸을 테니까요. 눈이 얼마나 많이 왔을지 상상이 가기 시작합니다.
여유롭게 출발한 산행, 처음엔 그랬습니다. 다만 아주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아무도 앞서 간 흔적이 없어 러셀을 하면서 가야겠다 싶을 뿐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제법 위에는 눈이 많이 쌓였겠구나 설렜습니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눈의 양이 많아지더니 내가 앞서 걷기 시작한 지 꽤 되어 고도 1000미터 쯤 오르니 바닥에 30센치쯤 쌓였습니다. 게다가 눈의 무게를 못 이긴 넝쿨이나 덤불들이 길을 막는 농도가 늘어나 피해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갈만 했습니다. 해발 1200미터쯤, 이때부터는 눈이 무릎에 찼습니다. 그래도 길은 뚜렷해서 그런 대로 갈만 했습니다. 바람은 드셌습니다. 해가 좀 반짝 났으면 했으나 여전히 흐렸습니다. 장갑은 나무를 헤치고 오느라 젖어서 다른 장갑으로 갈아 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잘 알아볼 수 없는 곳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하여 조금만 길에서 벗어나면 지금 내린 눈에다 전에 내렸다가 녹지 않은 묵은 눈이 밑에 있어서 허리까지 푹 빠졌습니다. 그러면 오도가도 못할 정도로 발을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대로 속도를 내서 왔는데, 이때부터는 올라가는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버거웠습니다. 러셀다운 러셀이었습니다. 길을 잃었다 찾기를 여러 번, 온통 하얀 눈쌓인 산, 길인 듯 접어들면 길이 아니어서 다시 길을 찾아 여러 번 헤맸습니다. 이쯤부터는 이번엔 비는 내린 적이 없고 눈만 내렸다는 증거일 겁니다.
길은 정확히 몰라도 방향은 분명이 알고 있으니 길을 잃어 문제가 될 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다녀본 길이니까요. 문제는 조금만 길을 벗어나면, 길은 사람들이 다져놓아서 이번 눈만 문제가 되는데, 길을 벗어나면 묵은 눈이 그냥 쌓여 있기 때문에 발이 푹 들어가서 허리까지 빠졌습니다. 이쯤 빠져들면 아무리 체력이 좋기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은 멀지 않았으나 전진하기가 버거우니 걱정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올라온 길이야 우리 흔적이 있으니 다시 내려가는 데는 지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지가 바로 저긴데, 1키로 남짓만 버티면 정상에 갈 수 있는데 고민이었습니다. 친구의 표정을 살피니 조금은 겁이 난듯 했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그런 표정을 감춰야 했습니다. 그래야 불안해 하지 않을 테니까요.
친구에게서 지팡이 하나를 넘겨 받아 깊이를 재면서 길을 찾습니다. 친구가 불안하지 않도록 푹푹 빠지는 눈에서 길을 찾았다 잃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조금씩 정상 쪽으로 조금씩 다가갑니다. 일부러 중간중간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나의 그런 즐기는 모습이 동행한 친구의 불안감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설렘을 주었으나 걱정스럽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자유롭게 걸을 수 없으니, 힘에 버거운 길을 가려니 설렘을 두려움이 서서히 덮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설렘을 살리기 위해선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결단을 내릴 때도 계산에 둡니다. 1미터 1 미터 결정을 미루며 앞으로 나갑니다. 앞으로 계속 갈 것이냐 되돌아 하산할 것이냐, 두 마음을 친구 몰래 품습니다. 결정은 내가 해야 할 판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마음을 숨기고 자신감 있는 듯 길을 엽니다. 내 결정에 맡긴 듯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냥 따라옵니다. 정상에 갈 수 있을까요?